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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검은돈 봉쇄냐 생활의 불편이냐

대한민국 금융 질서를 한순간에 뒤바꾸어 놓았던 금융실명제가 12일로 도입된 지 20년을 맞았다. 때맞춰 이제는 법을 손볼 때가 됐다는 ‘보완론’도 나온다. 핵심은 ‘차명(借名) 거래 금지’다. 금융실명제법을 고쳐 기존의 가명(假名) 거래뿐 아니라 차명 거래도 원칙적으로 규제하고, 처벌 규정도 넣자는 게 주 내용이다. 실명제를 사실상의 ‘실소유 거래제’로 바꾸자는 의미다. 1982년 첫 논의 이후 숱한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실명제는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금융실명제 20년, 차명 금지 논란
지하경제 양성화 막아라
"비자금·탈세 통로" 잇단 법안 발의
곗돈·자녀통장 등은 예외로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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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행은 최근 ‘1박 2일 적금’이란 적금 상품을 내놓았다. 대표 이름으로 개설한 통장에 가족이나 친지가 매달 조금씩 돈을 넣어 단체 여행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설계한 상품이다. 상품개발 담당자는 “돈을 모아 여행·회식에 쓰는 이른바 ‘계통장’이 널리 쓰이는 점에 착안해 이를 상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명의자와 거래를 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면에서 보면 일종의 ‘차명 통장’이다.



 대기업 중간 간부 최모(42)씨는 여윳돈 9000만원을 자신과 가족 명의로 저축은행 계좌에 나눠 넣어뒀다. 2년 전 저축은행 사태를 겪고 나서였다. 최씨는 “예금자 보호 한도가 계좌당 5000만원이라 한 계좌에 넣으면 만약의 경우 돈을 모두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에서 분산 예치했다”고 말했다. 이 역시 차명 거래다.



 차명 거래라고 하면 흔히 대기업이나 정치인, 자산가들의 탈세나 비자금 마련 통로를 연상한다. 하지만 차명의 관행은 생각보다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자녀 이름의 통장을 만들어 적금을 넣어주거나, 거꾸로 취업한 자녀의 월급을 부모가 받아 관리해 주는 것도 원칙적으로 차명 거래다. 차명은 그 층위와 의도에 따라 때로는 ‘관행’이나 ‘재테크’란 이름으로 불리고, 때로는 범죄의 수단이 돼 왔다.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이 차명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법안이 여야 의원 사이에서 줄줄이 발의되고 있다. 논란의 씨앗은 실시 때부터 잉태했다. 현행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은 실명 확인을 하지 않은 금융회사와 남의 명의를 훔친 사람만 처벌한다. 가명(假名)과 도명(盜名)은 규제했지만 차명은 풀어 놓은 셈이다.



 이런 ‘법의 구멍’을 메워 불법 거래에 사용될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게 법안 추진자의 공통된 목소리다. 여기에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 세원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조세연구원 김재진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대기업·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비자금 사건은 모두 차명이 활용됐다는 게 공통점”이라면서 “차명 거래를 그냥 놔두고서는 현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실명제의 진화’ 앞에는 숱한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광범위한 차명 관행을 일률적으로 다스리기엔 부작용이 너무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 악의가 없는 차명 거래가 99% 이상인데 자칫 몇몇의 불법 때문에 금융 거래자 모두가 불편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그런 불편을 감수한다고 한들 가명이 아닌 차명은 원천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이에 선의의 차명은 특례로 숨구멍을 틔워주면 된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실제 제출된 법안은 부부간 거래, 종중(宗中)·동문회·종교단체의 대표자가 자신의 통장으로 모임 자금을 관리하는 것 등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숱하게 많은 차명 관행을 어떻게 일일이 구분해 법에 넣을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세무당국의 한 관계자는 “사회 변화에 따라 무수히 많은 차명 거래 유형이 등장할 것인데 그때마다 법을 고치게 되면 말 그대로 누더기법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장에는 선의와 악의를 구분 짓기 힘든 이른바 ‘회색지대’도 존재한다. 정부 한 관계자는 “빚이 많아 쫓기거나 신용불량으로 계좌를 열지 못해 남의 계좌를 쓰는 사람, 또 다수의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존재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면서 “과연 법으로 이들까지 고려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금융권에서 차명 거래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차명은 그 거래 규모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 즉 전면 규제로 생길 수 있는 경제적 충격과 파장이 얼마나 클지, 그 파장이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파장을 증폭시킬 장치도 눈에 띈다. 상당수 법안은 차명 계좌에 들어있는 자금을 명의자 것으로 간주하거나 명의자가 신고할 경우 증여받은 것으로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의자의 ‘배신’ 가능성을 높여 차명 거래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여기에 차명 금지 이후 규제 기관의 개입 강도도 보다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민병두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금감원장과 국세청장이 실명거래가 지켜지는지 금융회사와 거래자를 상대로 조사하고, 금융거래정보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규정해 놓고 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돈이란 건 조그마한 위험의 소지만 생겨도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고 우려했다.



 금융시장을 관할하는 금융위원회의 시각도 이와 유사하다. 한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시장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게 오랜 기간 시장을 다뤄본 재무부-금융위 관료의 시각”이라면서 “거래 위축으로 자칫 하반기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인 경기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도 최근 불거진 차명의 폐해를 그냥 두긴 어렵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 때문에 차명이 범죄에 동원됐을 때 보다 강력하게 처벌하는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 ‘범죄수익 은닉 규제법’과 ‘조세범 처벌법’은 특정경제범죄·도박·증권범죄·공무원 범죄 등 중대범죄에 차명 거래가 활용될 경우 거래 당사자를 형사처벌하고 자금을 몰수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금융연구원 김자봉 연구위원은 “미국은 조세범에 대해 100년 넘는 징역을 부과하는 등 철저히 응징해 ‘한번 걸리면 끝난다’는 인식을 심어줬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해온 게 사실”이라면서 “차명 금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법이 발각됐을 때 얼마나 강력하게 법 집행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라고 말했다.



조민근·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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