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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는 투병에 가족 뿔뿔이 … 신약은 엄두 못내

일산백병원 수중치료실에서 환자들이 물리치료사의 지도에 따라 운동을 하고 있다. 일반 환자는 물론 다발성경화증을 앓는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하지만 이런 시설을 갖춘 곳이 많지 않다. 최정동 기자
“하나 둘, 하나 둘….”
물리치료사의 구령에 맞춰 수조 속에서 신현민(59)씨가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목과 팔에 부표를 감싼 채 물에 떠보는 치료가 이어졌다. 수족관처럼 투명 아크릴로 감싸진 대형 수조 속. 인제대 의대 일산백병원에 있는 ‘수중치료실’의 풍경이다.

매일 사투 벌이는 희귀·난치병 환자들


치료를 받는 신씨는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장이며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 환자다. 중추신경을 둘러싼 절연물질이 벗겨져 생기는 만성 희귀질환이다. 팔다리가 마비되는 지체장애, 평형감각이 약해 툭하면 넘어지거나 배뇨·배변을 원할 때 못 보는 감각 장애, 한여름에도 얼음장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통증 장애까지 다양한 증상으로 고통받는다. 환자들은 근력과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수중 치료를 비롯한 정기적인 물리치료가 필수적이다.

가장 기본적인 물리치료 현장에서도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아픔은 이어진다. 신 회장은 “이런 수중 물리치료를 받으려면 일반 물리치료까지 합쳐 연간 150만~200만원쯤 들어간다. 장애인 복지시설에는 물리치료사가 근무 중인 수중치료 시설이 대부분 있는데, 정작 경화증 환자 대부분은 장애 등급이 없어 그런 시설을 못 쓴다.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이 겪는 어려움 중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말했다.
 
1년 약값 5억 드는 질환도
매일 사투를 겪고, 벼랑 끝에 몰리는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의 사례에 비하면 장애 등급 문제는 오히려 사소해 보인다. 많은 이가 경제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채 중산층은 빈곤층으로, 극빈층으로 거듭 추락한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정서적 고통도 심할 수밖에 없다.

“아이 아빠와는 별거 중입니다. 희귀질환자 가족 중에는 이런 경우가 흔해요. 처음에 아이가 아플 때는 가족끼리 잘 뭉치지만 몇 년씩 희망 없는 투병생활을 계속하느라 경제적 부담이 한계에 이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죠. 누가 잘못했는지 따질 것도 없어요.”

진행성근이영양증(근디스트로피·mu scular dystrophy)을 앓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A씨의 담담한 고백이다. 이 병은 근육의 퇴행과 위축이 진행되는 난치병이다. 아이가 생후 6개월 때 진단을 받았다. 미리 알고 대비했지만 아이의 증상이 심해질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없어 풀썩 넘어지는 게 시작이었다. 온 다리가 멍 투성이다. 이제는 책이나 신발 주머니도 들기 어렵다. 언젠가는 휠체어에 앉을 것이다. 아이의 꿈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축구선수였지만 그 뒤 과학자로 바뀌었다. 사춘기가 가까워진 요즘엔 아이가 “이런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한다. A씨의 가슴은 미어진다.

경제 문제도 크다. A씨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별거 중인 아빠가 보태주는 걸 포함해 한 달 200만원 남짓한 수입이 있다. 물리치료 등은 괜찮지만 정기적으로 신경초음파 등 보험 비급여 진료를 받거나 심리·정서 상담을 할 때 들어가는 돈은 부담이 된다. 아이가 더 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 미래에 대한 대책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A씨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진다.

희망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서구인들에게 흔한 일부 희귀질환은 치료용 신약이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환자들에게 기적이어야 할 신약의 등장이 더 괴로운 경우도 있다. 국내 환자 수는 2000명이 안 되지만 전 세계 환자가 250만 명에 달하는 다발성 경화증에 이런 사례가 많다.

수년 전 나온 ‘길레니아’라는 신약은 기존 ‘인터페론 베타’ 주사에만 의존해 온 다발성 경화증 환자들에게 희망을 줬다. 먹는 약인 데다 인터페론이 잘 안 듣는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다. 하지만 비싼 약값 때문에 아직 보험 처리가 안 된다. 국제 가격은 월 300만원 수준. 제약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약가를 다투고 있어 아직 수입이 안 된다. 멀쩡한 신약이 있는 걸 아는 환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발성 경화증처럼 환우회가 조직돼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환자가 수십 명도 안 되는 질환의 경우 관련 정보 자체가 미비해 인터넷을 뒤져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약이 간혹 나와도 엄청난 약값에 절망한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장모(33)씨는 PNH(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 환자다. 면역 체계 이상으로 적혈구가 손상돼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병이다. 그냥 두면 10년 이내에 숨진다. 조금만 무리해도 위험하기 때문에 장씨는 아무 일도 못한다. 2주에 한 번씩 스테로이드 성분의 약을 먹으며 말 그대로 연명(延命) 중이다. 그런데 몇 년 전 기적의 신약이 나왔다. 미국 알렉시온사가 개발한 솔리리스라는 약이다. 꾸준히 먹으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가격이다. 2주에 3병을 써야 하는데 1병에 736만원이나 된다. 연간 기준으로 5억원쯤 돼 보험 적용이 까다롭다. 보험이 되면 연 수백만원만 개인이 부담하면 되지만 국내 200여 명 환자 중 중증 20여 명만이 혜택을 받는다.

장씨는 “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합병증 때문에 정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증이어야 한다. 나도 병이 더 악화돼야 적용을 받을 것 같다. 합병증이 생기기 전에 치료받으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겠지만 꿈에 불과하다. 약값이 너무 고가이고 나 같은 환자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개선을 요구할 힘도 없다. 가끔 보험재정이 엉뚱한 곳에 낭비된다는 뉴스를 들으면 엄청난 분노가 밀려온다. 사회가 우리 같은 사람을 버려두는 것 같아 소외감도 든다”고 말했다.

일본선 개인 부담 10% 미만
신약으로 인정받지 못한 대체 의약품의 경우는 더 안타깝다. 영화로 유명해진 ‘로렌조 오일’은 국내 환자 수가 20명도 안 되는 부신백질이영양증(ADL)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에서는 모두 효과가 입증돼 보험 혜택을 받지만 국내에선 보험은커녕 정식 의약품으로도 인정을 못 받는다. 월 100만원꼴인 약값은 고스란히 환자들의 부담이다.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선진국의 접근 방법은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공공의료보험 체계가 잘돼 있어 개인 부담이 거의 없는 영국과 유럽 국가는 논외다. 우리와 비슷한 보험제도를 갖춘 일본에선 희귀·난치성 질환의 경우 개인 부담이 10% 미만이며 국가가 희귀·난치성 질환 연구를 위해 매년 2조원 가까이 투자한다. 대만도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개인 부담이 없다.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산정특례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다만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인정하기 위한 명확한 진단 기준의 마련 등 선행 과제가 있다. 또 선정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질병 연구와 치료법 개발도 함께 이뤄져야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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