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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시절엔 유연 … 취임식 날 아소 망언이 찬물

2004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자민당 간사장 자격으로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접견하고 있다. [중앙포토]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가 아닙니까.”
2006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 대표 자격으로 일본을 찾았다. 일본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은 이같이 되물었다. “독도는 명백한 우리 땅이니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특유의 반문(反問)어법으로 못박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를 만나서도 “일본 지도자들은 언행을 조심하고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을 보는 시각

하지만 “양국 간 정치적 냉각이 계속 방치되면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조속히 개선돼야 한다는 데는 일본 측과 인식을 같이한다”고 밝혔다. 두 달 뒤엔 서울에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연락회 대표 요코타 시게루(橫田滋)를 접견하며 일본의 최대 현안인 납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의원 시절(1998~2012년) 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는 이렇게 유연한 편이었다. 당선인 시절에도 일본을 배려했다. 통의동 인수위 집무실에 첫 출근한 1월 4일 첫 공식 일정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단 접견으로 잡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사단에 “2006년 방일 당시 관방장관이던 아베 총리와 만찬하며 좋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관계는 더 있다. 2006년 5월 박 대통령이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하자 아베는 열흘 뒤 고베산 고급 쇠고기와 고급 과자 마미겐을 전했다. “일본에선 수술받은 사람이 빨리 회복하도록 쇠고기를 먹게 한다. 다른 이에게 주지 말고 직접 드시라”는 위로 편지와 함께였다. 박 대통령은 뒷날 감사의 뜻을 담은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또 2대에 걸쳐 총리를 배출한 후쿠다(福田) 집안(다케오(康夫)·야스오(赴夫))과도 각별한 관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7년 서울에서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와 회담한 게 계기가 됐다. 박 대통령은 당시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그의 부인인 후쿠다 미쓰에(福田三枝) 여사를 영접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그 뒤로 30여 년간 안부를 묻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박 대통령은 2006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바쁜 일정을 쪼개 도쿄 세다가야(世田谷)에 있는 미쓰에 여사의 자택에 들러 1시간 가량 만났다. 1년 뒤 총리에 오르게 되는 아들 야스오도 합석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26일 서울을 찾은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를 접견하며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인연이 있다.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는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재임 당시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했고, 아들 야스오 전 총리도 그 뜻을 이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며 “박 대통령이 후쿠다 집안과 친분이 깊은 건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말했다.

7년 전 아베에게 던진 메시지 재연
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가 주춤하게 된 건 취임식 날인 2월 25일 경축사절로 온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장관의 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외교 관계자들은 전한다. 아소 부총리는 박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에선 남북전쟁을 보는 시각이 지금도 남부와 북부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궤변을 늘어놨다. 주일 대사를 지냈던 전직 고위 외교관은 “박 대통령 취임 날 일본 정부를 대표한 아소가 면전에서 망언을 해 대통령의 대일 운신 폭을 크게 좁혀놨다”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르면서 박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계속 높아졌다. 취임 뒤 첫 대국민 연설인 3·1절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일본을 겨냥했다. 이 말은 2006년 일본을 찾은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당시 관방장관)에게 한 발언과 똑같아 아베 총리에게 직접 던진 메시지란 해석이 나왔다. 또 박 대통령은 한·미와 한·중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치렀지만 한·일 정상회담은 언제 치를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현실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다.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끌고 갈 동반자’란 인식이다. 하지만 일본의 올바른 역사 직시와 이를 통한 신뢰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북핵 문제로 한·일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지만 이를 위해서라도 일본이 전향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북한 변수’도 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또 다른 고위 외교관은 전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27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중국 측이 기피해 온 한·중·일 정상회담을 올해 안에 개최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외교 실무진에선 “한국은 한·중·일 협력사무국 의장국인 데다 중·일을 중재하는 역할로 외교적 입지를 넓혀야 한다”며 “따라서 3국 정상회담을 조속히 열 것을 중국에 촉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연내 개최’ 선에서 중국과의 합의를 마무리했다. 당시 중국은 센가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를 놓고 일본과의 갈등이 고조된 상태였다.

일본 근무 경력이 있는 한 고위 외교관은 “박 대통령은 북한 문제가 가장 시급한 만큼 일본보다 중국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고 봤을 것”이라며 “이에 따라 한·중·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되 중국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건 피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대일 외교 키워드는 ‘안정화’
당분간 한·일 정상 간 대화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일본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주목된다. 경축사 초안을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 작성 중인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외교부·통일부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외교안보수석실 등이 의견을 올린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방미·방중 당시 연설 직전까지 문안을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며 “8·15 경축사도 초안과는 상당히 다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서도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 나온 메시지의 연장선상에서 일관성 있는 얘기가 나올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대일 메시지는 ‘일본의 역사 직시→ 신뢰 구축→화해와 협력의 미래’란 게 골자였다. 8·15 경축사도 이런 틀의 메시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외교 소식통들은 관측했다.

초점은 최근까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따른 만큼 8·15 경축사에 더욱 강경한 대일 비난이 추가될 것인지 여부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망언과 관련해 주목하는 일본 정치인은 총리와 부총리, 외상·관방장관”이라며 “아소 부총리를 제외하면 아베 총리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에 관한 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한국을 신경 쓰고 있다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의 대일 메시지를 전망하려면 이런 걸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대일 외교 키워드는 ‘안정화’다. 한·일 정상회담을 한 뒤에도 일본에서 망언·망동이 반복돼 불안정한 관계가 이어진다면 회담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얘기다. 박 대통령 본인도 지난달 10일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오찬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정상회담을 해서 끝나자마자 또 독도·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미래지향적으로 가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사전 조건을 걸고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건 아니다”면서도 “참의원 선거 등 정치적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일본이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야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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