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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신랑 어설픈 큰절에 하객들 웃음보

3일 스웨덴 스톡홀름 엘렌키 공원에서 열린 한국 전통혼례에서 갓을 쓴 도산우리예절원 이동후 원장이 집례하고 있다. 김해수ㆍ권효섭(도산우리예절원)
1653년(조선 효종 4년) 8월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배 스페르웨르(Sperwer)호는 제주도 부근에서 거센 폭풍을 만났다. 배는 난파해 선원 64명 중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바다를 떠다니다 제주도에 간신히 상륙한다. 조선 관원은 이듬해 이들을 한양으로 압송한다. 선원들은 2년 뒤 다시 전라도로 유배돼 여수·순천·남원 등지에서 흩어져 생활했다. 당시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 헨드릭 하멜이다. 그는 스페르웨르호의 기록을 맡은 서기였다.

스칸디나비아에 선보인 한국 전통혼례

하멜은 조선 땅에 억류된 14년 동안 감금 같은 악조건에서도 서기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체험과 보고 들은 조선의 지리와 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 등을 세밀하고 예리하게 기록했다. 바로 『하멜표류기』다. 이 기록은 조선의 모습을 서방에 처음으로 전하는 다큐멘터리가 됐다.

『하멜표류기』 뒤에 실린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당시의 혼인 풍습이 소개된다. ‘그들은 8세 혹은 10세부터 결혼하기 시작하므로 연애를 하지 않는다. 처녀는 그가 외동딸이 아니면 그때부터 시집살이를 한다. 그는 살림살이와 가솔을 거느릴 줄 알 때까지 시집에서 산다’. 하멜은 민며느리 습속을 혼례제도의 큰 줄기로 이해한 듯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펜은 섬세했다. 잔칫날 모습도 그림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신랑이 장가들러 가는 날에는 말을 타고 친구들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신랑이 신부 집 문 앞에 와서 말을 멈추면 신부 집 친족들이 성대하게 환영을 시작한다’. 혼인 당일 신랑의 당당한 모습과 신부 집의 들뜬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360년 전 하멜이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목격한 우리의 옛 혼례가 북유럽의 심장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재현됐다. 이번에는 조선의 후예들이 지구 반대편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찾아가 실제 혼례를 한국 전통식으로 진행했다.

3일 낮 12시 스톡홀름의 엘렌키 공원. 사모관대에 관복을 입은 파란 눈의 신랑이 부모와 함께 신부 집에 당도했다. 혼례를 앞둔 신부가 친정 부모에게 마지막 큰절을 올리자 아버지 강진중(56)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영아! 시어른 모시고 행복하게 잘살아라….” 친정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훔쳤다. 경남 하동이 고향인 강씨는 1982년 스웨덴에 유학 와 93년 스톡홀름에 간이식당을 열었다. 외국에 정착한 그는 한국인 입양아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10남매 중 아홉째로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강씨로서는 그들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도 스웨덴 한인입양인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2003년부터 2년 동안엔 스웨덴 한인회장을 지냈다.

잠시 뒤 대례상 앞에서 혼례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지부가사우차(壻至婦家俟于次, 신랑은 신부 집에 이르러 절차를 기다리십시오).” “주인출영!” 갓을 쓴 도산우리예절원 이동후(76) 원장이 신부 아버지에게 새 사위를 맞으라는 홀기를 불렀다.

공원에는 한국 전통혼례를 보려는 교민과 스웨덴 신랑 친지 등 400여 명이 모였다. 신랑이 대례상 앞으로 걸어 나와 나무 기러기를 받고 큰절을 올린 뒤 대례상 앞에 섰다. 연지곤지에 족두리를 쓴 신부가 신랑 앞으로 나섰다. 신부가 신랑에게 먼저 큰절을 올리고 신랑은 답배를 했다. 스웨덴 신랑의 어설픈 절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랑·신부가 마음을 합치는 술잔을 나누면서 혼례는 끝이 났다. 혼례를 지켜본 제니(23)는 “한국식 전통결혼은 아름답고 엄숙하다”고 말했다. 스웨덴에 24년째 살고 있는 정난교(47)씨는 두 딸의 손을 잡은 채 “드라마로만 보던 전통혼례를 스톡홀름에서 보게 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혼례에 이어 신부는 시댁으로 신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한국에서도 거의 사라진 가마가 하객의 눈길을 끌었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돈 뒤 (시댁으로 꾸며진) 천막으로 들어섰다. 가마 앞에는 사물놀이 팀이 흥을 돋웠다. 신부는 스웨덴 시부모에게 큰절로 첫인사를 올렸다. 이른바 폐백 절차다. 시어머니는 절을 받고 새 며느리에게 밤을 쥐여 주었다. 이날 가마는 신부 어머니의 요청으로 예절원이 한국에서 수소문해 직접 공수한 것이다. 운반비만 160만원이 들었다. 스테판(39·한국명 손학수) 등 스웨덴 한국 입양인들은 파란색 한복에 패랭이를 쓰고 직접 가마를 멨다. 스테판은 행사에 참여해 영광이라고 말했다.

행사를 지켜본 주스웨덴 손성환 대사는 “양가의 만남이 전통혼례를 통해 한국과 스웨덴 문화의 만남으로 승화됐다”고 축하했다. 스웨덴에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과 문화를 모르는 입양인이 1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 이동후 원장은 “우리 교민과 우리 문화가 단절된 입양인에게 우수한 한국 정신문화를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고 말했다.

이날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백년가약을 맺은 신랑·신부에게 한국은 인연의 땅이었다. 둘 다 스웨덴에서 자랐지만 첫 만남은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신부 강하영(27)씨는 룰레오공대 도시계획과를 다닐 때 교환학생으로 자매결연대학인 한국 아주대에 머물렀다. 당시 칼스타드대를 다니던 동갑내기 신랑 파트릭 프레드릭손(Patrik Fredriksson)도 공교롭게 자매결연대학인 아주대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었다.

당시 하영씨는 북유럽의 혹한이 남긴 통풍을 앓고 있었다. 하영씨가 다닌 대학은 스웨덴의 가장 북쪽인 룰레오에 있었다. 여름에는 24시간 해가 떠 있지만 겨울엔 20시간이 밤이고 추울 때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곳이다. 결국 발에 통풍이 왔고 우울증까지 겹쳤다. 하영씨는 한쪽 다리를 절게 돼 예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 부모는 용한 의사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국에 가서도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효과는 없었다.

귀국이 두 달 정도 남았을 때였다. 아주대 캠퍼스에 있던 하영씨 귀에 스웨덴 말이 들렸다. 대체 누굴까. 스웨덴 남자 파트릭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고 둘은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하영씨는 파트릭의 도움을 받으며 스웨덴 카로린스카병원에서 통풍을 치료한 덕택에 1년이 지나자 병세가 호전됐다. 절뚝거리던 발은 어느새 똑바로 걸을 수 있었고 구두도 신을 수 있게 됐다. 기적이었다. 아버지 강씨는 “사랑이 고통을 치유하고 역경을 이기게 한다는 말을 실감했다”며 “사위 파트릭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파트릭은 세계적인 전자기업 에릭슨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스웨덴 가정 출신이다. 정이 많고 합리적이다. 그의 부모는 벌써부터 한국인 며느리를 딸처럼 감싸고 있다.

8월의 신부 하영씨는 스웨덴에서 둘째로 큰 고등학교(전교생 1600명)의 교지 편집장을 맡았었다. 주관이 뚜렷하다. 대학 전공을 살려 졸업과 동시에 SWECO(스웨코)라는 건축설계회사에 들어갔다. SWECO가 녹색 신도시 함마비를 건설하던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스웨덴 방문 때 브리핑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엘리트로 성장한 그녀는 족두리 쓰고 가마 타고 스웨덴 청년을 신랑으로 맞았다.



도산우리예절원
2005년 우리 예절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부설기관으로 출발했다. 지금까지 400여 명의 전통예절인을 배출했다.
북유럽 전통혼례는 3년 전 금정호(70) 전 스웨덴 대사가 예절원을 찾아 특강을 한 게 인연이 됐다. 예절원은 송미화 연구원의 기획에 따라 20명이 자비를 들여 이번 북유럽 원정 혼례를 치렀다.
딸을 꼭 가마에 태워 시집보내고 싶다는 신부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경북 군위군 한밤마을에 남아 있는 꽃가마를 찾아내 항공편으로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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