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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내 인생의 변화구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중에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라는 것이 있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한때는 메이저리그의 날리던 스카우터였지만 이제는 점점 퇴물 취급을 받는 주인공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황반변성 증세마저 겹쳐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삶도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울적한 마음에 바에서 술 한잔을 하고 있던 중에 누군가 “왜 이렇게 짜증이야” 하고 말하자 거스는 “늙어서 그래!”라고 맞받는다. 왠지 그 말이 가슴에 아렸다. 그렇다. 푹푹 찌는 더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자신이 하릴없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짜증에는 젊은 날에 대한 회한도 없을 리 없겠으나 무엇보다도 이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속진(速進) 앞에 점점 무기력해지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자괴감이 더 클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무기력함에 저항할 인생의 변화구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 왜 없겠는가!



 # 얼마전 우편으로 한 권의 책을 받았다. 지난해 1월에 향년 89세로 타계하신 서양사학계의 원로셨던 노명식 교수의 유작(遺作)이었다. 그 책엔 ‘21세기 한반도의 세계사적 전망’이란 제목 아래 ‘노명식 전집 13’이라는 넘버링이 매겨져 있었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인 2011년 자비로 노명식 전집 12권을 출간해 지인과 후학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셨던 그대로 이번에는 노 교수의 장남 노삼규 선생이 아무 대가 없이 책을 보냈다. 이렇게 책을 받아 드니 노 교수께서 아직도 살아계신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유고집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책의 주제가 아흔을 목전에 뒀던 이가 썼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재적이고 그 내용, 특히 인용서와 각주 역시 최신 경향을 담고 있었다. 30여 년 전 강단에 서서 서양사학사와 프랑스 혁명사를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노 교수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던 내게 그분의 우리 시대에 대한 현재적 분석은 역사학자였던 그이의 마지막 변화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노명식 교수의 유작을 받아본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또 한 권의 책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김남조 시인의 신작 시집 『심장이 아프다』였다. 그녀가 첫 시집 『목숨』을 낸 것이 한국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살아남은 1953년이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올해 그녀는 열일곱 번째 시집으로 『심장…』을 펴냈다. “숨 쉬는 공부가/ 의료처방의 첫 과제이다/ 깊게 들이켜고 최대한 뿜으라 한다/ 주야간 수시로 연습하란다/ 모태 안의 태아일 때부터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일 기본 아닌가// 숨 쉬는 일 그 가련하고 죄 없음/ 각자 단독으로 행하며/ 동서고금의 동일방식인 점/ 옛 사람과 후세 사람들이 공평하게 위에 준하는 점/ 멈추지 말 일이나/ 영원한 휴식 예약 됨// 나는 반성한다/ 준엄한 예배당에서 단 한 번도/ 경건하지 않았음을” 이 시집에 실린 ‘숨쉬는 공부’라는 시다. 지극히 평이한 듯하지만 그 나이와 처지에 서 보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어들이 아닌가! 그 평이함 안에 지난(至難)했던 삶의 곡절을 함께 녹여내 거친 호흡의 내력을 담지 않았는가. 그래서 극한의 상황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모든 사람, 모든 동식물까지가 심장으로 숨쉬며 살고 있는 이 범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한 전율로 치받으니 나의 외경과 감동을 아니 고할 수 없다”고 쓴 시인의 머리글이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처럼 다가왔다. 우리의 호흡 자체가 경건한 예배라는 각성을 지극히 평범한 시어로 담아낸 것 역시 시인의 깊이 있는 변화구가 아니겠는가.



 # 삶의 모든 변화구는 깊은 성찰의 소산이요 결과물이다. 과연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의 변화구는 무엇일까? 어느 때부턴가 돌직구만을 선호하고 그것에 열광하는 이 세태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기 삶의 새로운 변화구를 던져야 할 때가 지금이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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