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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빅3 경쟁력 … 봐도 흉내 못 내는 암묵지 기술

중앙포토
2006년의 일이다. A기업이 불쑥 ‘한국 조선업이 언제까지 1등을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이 고객은 미래 성장산업을 찾는 중이었다. 여러 근거를 토대로 한국 조선업의 앞날을 예측해 봤다. 그러나 분석 결과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때 내린 잠정 결론은 ‘2013년이 조선업의 중요 변곡점이 된다’는 것이었다. 2008년께 중국 조선사가 한국 조선사의 생산 능력과 가격을 따라잡은 뒤 2013년께 중국이 한국보다 6% 더 싸게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값이 1% 싸다고 해서 고객이 단골 상점에서 즉시 발길을 돌리진 않는다. 하지만 차이가 5%를 넘어서면 얘기는 달라진다.

 불행히도 예상은 적중했다. 조선업 순위를 따지는 기준이 몇 가지 있지만, 지금 한국은 어떤 잣대를 쓰느냐에 따라 ‘아슬아슬한 세계 1위’ 또는 ‘중국과 공동 1위’다. 가파른 추락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조선’ 등과 같이 2000년대 호황기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에 세워진 중소 조선소의 상당수는 이미 쓰러졌거나 워크아웃 중이다.

  그래도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글로벌 빅3’는 아직 건재하다. 건조 난이도 등을 고려한 선박 크기인 수정환산톤수(CGT) 기준으로 볼 때 지난해 한국 조선업체는 세계 발주량의 35%를 수주했다. 수주 단가도 t당 3998달러로, 중국(2176달러)과 일본(1794달러)을 크게 앞섰다.

‘빅3’가 해양 플랜트나 고가의 대형 상선을 집중적으로 만든 결과다. 이들의 버팀목은 기술이었다. 불황과 중국의 맹추격 속에서도 기술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고부가 제품을 수주할 수 있었다. 기술 우위라고 하면 흔히 ‘연구실’이나 ‘특허’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업에서는 ‘기술 우위’ 출생지의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비결 1 … 고객을 잘 알았더니
90년대 중반 육지와 근해 유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제 유가는 계속 오르고 유전 개발은 북쪽을 향했다. 원유와 천연가스가 잔뜩 묻혀 있는 북극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여러 대기업이 극지방 유전 발굴에 뛰어들었다.

 러시아 국영 해운사인 소브콤플로트도 그중 하나였다. 이 회사의 배는 러시아 북쪽 바다의 바랜디 유전에서 퍼 올린 원유를 인근의 무르만스크 항구까지 운반했다. 편도 4일.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문제는 유조선이 지나가는 바렌츠 해가 1년 중 290일이나 1.5m 두께의 얼음으로 뒤덮인 극한의 바다라는 점이었다. 이런 곳에서 원유를 운반할 때는 쇄빙선이 앞장서 얼음을 깨주고 유조선이 그 뒤를 졸졸 따라 가야 한다.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성중공업은 2007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배를 내놓았다. 다소 어려운 말로 ‘극지 운항용(몹시 추운 곳을 다닐 수 있다) 전후 방향(일반적인 배는 직진만 하는데, 얼음 바다 위에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전진·후진이 가능하다) 쇄빙 유조선(얼음도 깨고 기름도 운반한다)’이었다.

 고객의 시각에서 배를 생각하니 각종 기술이 필요했다. 지나간 길이 바로 얼어붙는 바다에 갇히지 않으려면 전진과 후진이 모두 가능해야 했고, 얼음을 깨기 위해선 보통 유조선보다 선체의 경사를 급하게 만들어야 했다. 배가 얼어붙는 것을 막고자 선체에 열 코일도 깔았다. 이런 기술이 모여 만들어진 최초의 쇄빙 유조선은 보통 유조선 가격의 세 배에 팔렸다.
 
비결 2 … 내가 뭘 잘하는지 알았더니
요즘 조선 3사는 ‘명품 조선소’에서 ‘바다 위(또는 밑) 공장을 만드는 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토탈이나 로열더치셸 등 과거 이들에게 유조선을 발주했던 오일 메이저들이 이제는 플랜트를 건조해 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를 가리켜 흔히 “한국이 조선 대국에서 해양 플랜트 강국이 됐다”고 말한다.

 배는 운송·교통수단이다. 해양 플랜트의 속성은 생산시설이다. 따지고 보면 이 둘이 딱히 가까운 영역이라 하기 어렵다. 배 짓기 전문가가 공장도 잘 짓는다는 건 초밥 요리사가 컴퓨터 수리에 능하다는 것만큼 낯설게 들릴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배와 공장, 모두 바다에 있어야 했다. 배 짓는 기술을 가졌던 조선 3사는 이를 기반으로 바다 공장을 짓는 기술로 영역을 넓혀 갔다.

 현대중공업이 최근 건조하고 있는 원통형 FPSO(부유식 원유생산 저장 및 하역설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골리앗’으로 불리는 이 설비는 일반적인 사각형 크기의 FPSO와 비교해볼 때 폭이 훨씬 좁다. 폭이 좁으면 파도와 바람의 저항을 적게 받아 흔들림이 최소화되고, 운동성은 높아지는 등 각종 장점이 생긴다. 문제는 폭 좁은 곳에 필요한 설비를 모두 설치할 수 있느냐다. 작은 공간에 수많은 설비를 세울 수 있는 설계 능력을 축적해온 선박 건조 경험이 빛을 발했다. 거친 파도와 바람에 수십 년을 견디는 구조, 거대 구조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만들고 설치하는 능력처럼 그동안 선박을 만들며 다져진 역량이 바다 공장 짓는 기술로 확장됐다. 한국 조선 3사는 이를 잘 활용, 발전시켜 이전에 없던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과거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기술 우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비결 3 … 한계를 알았더니
컨테이너선은 가뜩이나 경쟁이 심한 조선업의 전통적인 영역 가운데서도 ‘레드 오션’으로 꼽힌다. 공급은 넘치고 글로벌 경기 불황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물동량이 정체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 우위는 레드 오션도 블루 오션으로 바꾼다. 지난 5월 현대중공업이 수주한 1만8400 TEU, 즉 20피트짜리 컨테이너 박스 1만8400개를 실을 수 있는 배나 최근 대우조선해양이 완성한 1만8270 TEU급 ‘머스크 매키니 몰러’호가 그랬다.

 컨테이너선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후발 조선사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는 흔한 배에 속한다. 하지만 체급이 올라가면 얘기가 다르다. 2006년 1만TEU급의 컨테이너선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제 커질 수 있는 만큼 다 커졌다’고 여겼다. 각종 물리적인 제약 때문이었다. 일단 배가 1만5000TEU를 넘어가면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 등을 통과하기 어려웠다. 배가 들어갔다 나오는 항만 인프라도 문제였고, 배에 쌓인 컨테이너를 들어 운반하는 크레인의 규격도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한국 조선사들은 2만TEU급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서려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자 이것이 기술 개발로 이어졌다. 배 폭을 늘리는 것을 최소화한 대신 길이를 확장하면서도,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설계 기술이 나온 것이다.
 
기술 우위는 항상 ‘진행형’
한계를 파악한 뒤 이를 극복하고 자신과 고객을 잘 파악함으로써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얼핏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조선업의 사례를 보면 그리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일본은 1950년 ‘용접 블록공법’으로 세계 조선시장에서 패권을 잡은 뒤 이후 50년간 독주한다. 일본은 90년대 들어 그동안의 시장 우위에만 도취돼 기술 투자를 소홀히 했다. 한계에 도전하는 대신 이미 가진 기술의 경쟁 우위를 유지하려 했다. 즉 틀에 박힌 기존 설계를 갖고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선박을 제작할까에만 몰두했다. 설계를 표준화하고 인력을 줄이는 등 원가 절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뼈아팠다. 기술로는 한국에, 가격 경쟁력에서는 중국에 밀렸다. FPSO나 액화천연가스(LNG)선 같은 새 수요에 부응하지 못했다.

 기술은 후발주자라도 일정 여건만 되면 금세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설계 도면이나 과정을 뻔히 다 봐도 따라 하기 어려운 차원의 ‘암묵지(暗默知·체화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 기술로 나뉜다. 그리고 한때 후자에 속했던 기술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복제 가능한 것이 되곤 한다.

 한국 대형 조선사는 고객과 자신, 그리고 기존의 한계를 잘 파악함으로써 빠른 시간에 기술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5~10년 뒤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중국과 브라질의 조선사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빠르게 기술 격차를 줄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조선업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시장에서 입지를 가지려면 암묵지의 영역에 있는 기술에 끊임없이, 선제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런 기술은 앞으로 몇 년간은, 해양 플랜트의 상부구조 또는 해수면 밑의 채굴·분리·이송 설비 쪽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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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