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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0년간 모래에 묻혔던 ‘누란의 미녀’를 만나다

동서 1000㎞, 남북 400㎞에 달하는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사진작가 정철훈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빠져나온 길은 북쪽의 톈산산맥, 남쪽의 쿤룬산맥, 서쪽의 파미르고원에 둘러싸인 타림분지를 만나 두 갈래로 나뉜다. 북쪽 길은 톈산산맥의 남단을 바라보며 하미·투루판·쿠처·악수 등의 도시로 이어지고, 남쪽 길은 차르클리크·체르첸·니야·케리야·호탄·야르칸드 등으로 이어진다. 이 두 길은 카슈가르에서 서로 만난다. 둔황(敦煌)과 카슈가르, 그리고 두 길 사이에 동서 1000㎞, 남북 400㎞에 달하는 사막이 있다. 낙타로 여행하던 시절에는 이 넓이가 동서 6개월, 남북 1개월 이상의 시간적인 단위로 표현됐다. 이 사막에 타클라마칸, 즉 위구르어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천축(天竺)기행을 마친 혜초는 당(唐) 현종 개원 15년(727) 11월 상순, 이 중 북쪽 길인 서역북로를 택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파미르 고원에서 한 달을 걸어 소륵, 그러니까 지금의 카슈가르에 이른 뒤, 당의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처·언기를 지나갔다. 현장법사는 혜초와는 반대로 북로를 거쳐 천축까지 갔다가 귀환할 때는 남로를 택했다. 마르코 폴로 역시 현장과 마찬가지로 카슈가르·야르칸드·호탄을 거치는 남로를 택했다.

그 시절에 이미 남로는 사막화가 시작됐기 때문에 북로보다 여정이 더 힘들었다. 그래선지 혜초와 달리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공통적으로 밤에 사막을 지날 때, 목소리·악기 소리·북소리 따위를 듣다가 길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다.

시를 쓰던 20대 시절, 나는 타클라마칸을 꽤 동경했다. 그건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그럼에도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은 맞닥뜨려야만 할 어떤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인 1993년, 중국 정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는 사막공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런 도로가 두 개로 늘어났고, 빠르면 4∼5시간이면 타클라마칸을 건너갈 수 있다. 그 도로를 달려가다 보면 의외로 나무와 풀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방풍림을 조성하기 위해 50여 종의 나무를 실험한 뒤 그중 호양나무, 홍류, 사사, 사괴조 등 네 가지 수종을 도로 연변에 집중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덕분에 사막을 지나가는데도 불모의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우리 영혼의 키는 한 뼘에 불과하나
사막공로를 본격적으로 달린 지 불과 2시간 뒤, 우리는 사막의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혜초와 현장과 마르코 폴로였다면, 지금의 지구란 너무나 좁아서 인간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알기 어려운 곳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대에 그들의 육체적인 고난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 맞는다면,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해도 될 것이다. 쿠처의 시장에서 산 어린 양고기 구이에 투루판 포도주를 마시며 사막에서 보내는 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 거인에 비하면, 우리 영혼의 키는 기껏해야 한 뼘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고.

현대적 의미의 도로로서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곧장 이어지는 지름길이란 의미를 지녔다. 둔황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오래전부터 사막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사막공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서쪽의 카슈가르를 거쳐 사막을 에둘러야만 호탄 등의 남쪽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마르코 폴로가 북쪽 길이 아니라 남쪽 길로 간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모두 사막으로 변해버린 이 남쪽 길에 전설의 사막도시 누란이 있었다.

누란이라면 김춘수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그는 ‘명사산’이라는 중간 제목 아래 무슨 사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이런 시구를 줄줄 읊는다.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 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구백 이십 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은 한 줄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쓴 이야기와 겹쳐 읽으면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이라는 이 시구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에 따르면, 타림분지 남쪽의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에 백단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날아들었으나 도시 주민들은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그때 이방인 아라한이 이 불상을 숭배하기 위해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모래에 파묻고는 굶겼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그를 불쌍히 여겨 몰래 음식을 갖다줬다. 그러자 아라한은 그 도시가 곧 모래에 파묻힐 테니 몸을 피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다들 그 예언을 비웃었는데, 일주일 뒤 도시는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졌고 그 남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16세기 이슬람 문헌인 『라시드사』에도 나오는데, 그 전설의 배경이 되는 사막도시는 투루판과 호탄 사이 ‘로브 카타크’다. 여기서는 불교가 이슬람교로 바뀌었지만,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사막도시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이 두 이야기에 나오는 사막도시는 김춘수가 시에도 썼다시피 중국 타림분지 남쪽 로프노르 호수 인근에 있던 누란을 지칭하는 듯하다. 중국 문헌에 누란이 처음 등장한 건 『사기』 ‘흉노열전’으로 BC 176년의 일이다. 한나라와 흉노 모두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야만 하는 등, 약소한 오아시스 국가의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한나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왕이 살해된 뒤 누란은 나라 이름까지 선선(鄯善)으로 바꾸는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헌상의 이 도시는 7세기 무렵까지 그럭저럭 존속했다니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는 아닐 듯싶다. 전설 속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졌다는 누란을 찾아가려면 우선 애상조의 선율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게 좋겠다. 제목은 키타로의 ‘캐러밴서리(Caravansary)’. 천천히 하강하는 오카리나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30여 년 전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맛있게 담배를 피우시고, 나는 엔지니어의 꿈을 꾸며 열심히 수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KBS에서는 NHK와 CC-TV가 합작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를 매주 방영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타이틀의 낙타 대상들 장면과 주제곡인 ‘캐러밴서리’의 선율만은 지금도 어제 보고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1979년 누란(樓蘭) 유적지의 태양고분군에서 발견된 이 남자와 일명 ‘누란의 미녀’는 여전히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中 고고학자들 79년 태양고분군 발견
중국 문헌상의 누란이 아니라 전설 속의 누란이 부각된 것은 바로 이 다큐멘터리 덕분이다. 누란을 처음으로 탐사한 사람은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었다. 그는 1901년 겨울,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물을 얼음으로 저장해 20일간 사막을 횡단해 로프노르까지 가서 목간과 문서 등 누란의 유적을 발굴했다. 그 후로 오럴 스타인 등의 발굴이 이어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과 국공내전 및 공산화 등으로 누란은 다시 역사 속으로 묻혔다. 그러다가 1979년 12월, 중국중앙TV(CC-TV) 제작진과 중국 고고학자들은 대기 핵실험장이 있는 관계로 외국인은 출입 금지된 이 지역으로 들어가 탐사를 시작했다.

이 탐사에서 그들은 ‘누란의 미녀’라고 널리 알려진 미라를 발견했다.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이 미라는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인 기원전 19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죽을 당시의 나이는 약 40세, 신장은 155㎝였다. ‘실크로드’ 중국 제작진은 이 ‘누란의 미녀’뿐만 아니라 다른 미라도 매장된 태양고분군을 발견했다. 이 미라들은 중국 문헌에 나오는 누란보다 1800년 이상 앞서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미라의 두개골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은 고대 유럽 백인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루무치의 신장위구르박물관에 가면 유리관 안에 든 이들 미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금발머리에 가느스름한 얼굴이 특징적인 이들의 생김새는 확실히 중국인이나 몽골인과는 다르게 생겼다. 그뿐이 아니다. 같이 매장된 물건을 살펴보면 중국 문화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에 고대 인도·그리스·로마 문명의 흔적은 많다. 문헌에 남은 누란과는 다른 고대의 사막도시 누란이 거기 모래 속에서 3800년 동안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서 왔으며, 어떤 도시에서 살았으며, 왜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지게 됐을까? 전설로 전해오듯 종교인을 무시했기 때문에 신의 저주를 받아 도시 전체가 모래 속으로 파묻힌 것일까? 그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이들은 지금 막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박물관의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마치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왜 죽느냐는 질문 앞에서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처럼. 그 질문의 답을 찾을 때까지 길의 여정은 계속되리라.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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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