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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젠잉 추도식에 부인들 참석 막은 덩샤오핑

문혁을 발동시킨 마오쩌둥은 그간 한직에 있던 예젠잉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했다. 1966년 11월 25일, 마오쩌둥과 함께 홍위병을 사열하는 예젠잉(운전석 뒷자리).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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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2일,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이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10년 전, 중국의 운명을 바꿔놓은 대(大)전략가의 죽음에 온 중국이 떠들썩했다. 중앙정치국은 성대한 추도식을 준비했다. 참석자 명단을 짜느라 머리를 싸맸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예젠잉은 세 차례의 비공식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10번 결혼했다. 그중 7명이 생존해 있었다. 근 60살 차이가 나는 마지막 부인 외에는 모두 혁명과정에서 만난, 소홀히 대접할 수 없는 여인들이었다.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과 원수 네룽쩐(?榮臻·섭영진)이 지혜를 짜냈다. “부인들은 참석시키지 말자. 7명을 한자리에 모아 놨다간 큰일 난다. 개성 강한 여자들이라 무슨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싸움이라도 벌어졌다 하는 날엔 천하대란보다 더 수습하기가 힘들다. 우리 모두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20여 년 전 홍콩에서 “부인들에게 영결식 날짜를 틀리게 알려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개혁·개방 이후 최대 규모의 추도식이 끝나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우리는 한 명 뒤치다꺼리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예젠잉은 재주도 좋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이 중용할 만하다.” 한대(漢代)에 이미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4자성어를 만들어 낸 민족이다 보니 그냥 내버려 뒀다간 무슨 심한 말들이 나올지 몰랐다.

예젠잉의 장남 예쉬안핑(葉選平·엽선평, 당시 광둥성 성장)이 진화에 나섰다. 직접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유자녀들의 의견일 뿐 아니라 당 중앙의 결정이었다. 아직도 우리 형제들은 7명의 여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일단은 믿는 편이다.

중국의 무산계급 혁명가들은 한결같이 염복(艶福)이 많았다. 예젠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1949년 중공정권 선포 당시 5대 서기(五大書記)는 평균 3.2번 결혼했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공청(共産主義靑年團) 설립자 런비스(任弼時·임필시)가 한 번밖에 안 하는 바람에 평균수치가 낮아졌다. 류샤오치 6번, 마오쩌둥과 주더(朱德·주덕)는 4번 결혼했다.
10대 원수(十大元帥)의 평균 결혼 횟수는 4.9차례, 순전히 예젠잉 덕분이다. “그 바쁜 와중에 정말 부지런했던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대상도 근대중국 군벌의 시조 쩡궈판(曾國藩·증국번)의 집안 딸과 혁명가, 군인, 간호사, 학생 등 다양했다.

문인들도 뒤지지 않았다. 신중국 제1의 문호(文豪) 궈뭐뤄(郭沫若·곽말약)는 4차례에 불과했지만 기록을 생생히 남긴 덕에 아직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중국인들은 1995년 다롄(大連)에서 101세로 세상을 떠난 두 번째 부인인 일본 여인을 특히 애석해한다.

부모가 지어준 일본 이름을 버리고 궈뭐뤄가 지어준 안나(安娜)를 평생 사용한 이 여인은 원래 도쿄 성 누가 병원의 간호사였다. 1916년 6월, 오카야마(岡山) 6고에 재학 중이던 궈뭐뤄는 1고에 다니던 친구 병문안 갔다가 안나를 처음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애인일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미간에 빛이 났다.”

친구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나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망우(亡友)의 X레이를 보고 싶다.” 중국 청년의 편지를 받은 안나는 며칠간 잠을 못 잤다. 동봉한 영시(英詩)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40여 차례 영문 편지를 주고받은 안나는 쓰촨(四川) 천재와 결혼을 결심했다. 4남1녀를 연달아 출산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궈뭐뤄의 유곽 출입이었다. 귀국한 후에도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성병을 옮기고도 태연했다.

궈뭐뤄와 이혼한 안나는 죽는 날까지 저우언라이의 보살핌을 받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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