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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회장님’ 등장에 한숨 돌린 최태원 회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최태원(53·구속) SK그룹 회장 횡령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됐던 김원홍(52·전 SK해운 고문)씨가 대만에서 체포된 것은 최 회장에게 득일까, 독일까.

오는 9일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 최 회장의 입장에선 불리할 게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최 회장이 항소심 재판 막바지에 “김씨에게 사실상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씨가 체포됨으로써 재판 연기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형 선고를 피할 수 있는 동인(動因)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문용선 재판장은 “선고를 연기할지에 대해 정해진 게 없다”면서도 “올해 여름휴가는 없다”고 말했다. 김씨의 체포 과정과 SK 내에서의 김씨 역할, 향후 재판 전망 등을 분석해봤다.

김씨는 지난달 31일 대만 북부 지룽(基隆)시에 있는 온천시설 인근에서 이민법 위반 혐의로 붙잡혔다. 흰색 야구모자를 쓴 김씨는 순순히 대만 경찰의 체포에 응했다고 한다. 대만 경찰은 지난달 초 한국 사법당국으로부터 공식 협조요청을 받고 그를 쫓아왔다. 김씨는 2011년 3월 중국으로 떠난 뒤 같은 해 12월 대만에 들어갔다. 타이베이에 ‘안루(安路)무역공사’란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세워놓고 일정한 주거지 없이 살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지만 BMW 7시리즈 차량을 타고 다니며 호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관계자는 “대만 당국과 협의해 조만간 강제 추방 형식으로 김씨의 신병을 넘겨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 넘게 숨어 지내온 김씨가 체포되면서 SK그룹은 득실 계산으로 분주해졌다. 최 회장은 선물·옵션 투자를 위해 SK텔레콤 등 계열사에서 450억여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로 불구속기소됐지만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최 회장이 펀드 출자 선급금 명목으로 빼돌린 돈을 김준홍(47)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를 통해 송금받은 사람이 김씨인 것이다. 최 회장은 1심에선 김씨의 존재가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는 전략을 썼다. 그러나 2심에서 이를 깡그리 뒤집고 모든 책임을 김씨에게 미뤘다. 최 회장은 항소심 재판 막바지에 이르러 “펀드 출자와 선급금 등은 김씨의 요구에 따라 이뤄졌다. 2005년부터 맡긴 투자금 6000억원도 돌려받지 못했다”며 지난달 30일 김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재계 3위 오너가 수천억원을 맡긴 인물, 김씨는 누구일까. 증권사 출신 역술인으로도 활동한 김씨는 손길승 전 SK 회장의 소개로 최 회장을 만났다. 스스로를 “숫자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주가지수나 환율 등을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예측해 최 회장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상속세 문제로 고민하던 최 회장의 자산을 크게 불려주며 각별한 관계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SK그룹 내부에선 김씨가 지시하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야 한다는 뜻에서 그를 ‘묻지마 회장님’으로 일컫기도 했다. 김씨의 SK 내 위치는 지난달 11일 항소심 재판에서 공개된 그와 최 회장 동생인 최재원(50) SK 수석부회장 간의 대화 녹취록에서 엿볼 수 있다.

“너는 죄가 없는데 인간적으로 미안타.”(김씨)
“괜찮습니다.”(최 부회장)
“너는 죄 없고, 준홍이하고 내가 니 속인 거다. 흔들림 없이 다녀오너라.”(김씨)
“네. 알겠습니다.”(최 부회장)

녹음 파일을 듣고 난 항소심 재판장은 “대기업 오너 일가가 김씨에게 홀려 수천억원을 홀딱 빼앗겼다”며 “지금이라도 김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했다.

그동안 재판과정에서 최 회장은 “펀드 조성 자체를 몰랐다. 최 부회장이 주도했다”(1심)→“펀드 조성엔 관여했지만 선급금 송금은 몰랐다”(2심 첫 재판)→“김씨로부터 사기 당했다”(2심 막바지)고 주장을 바꿔왔다. ‘전달자’인 김준홍 전 대표는 “최 회장 형제가 펀드 조성과 자금 인출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진술해 최 회장 측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SK 측에선 김씨가 ‘반전 카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 부회장은 최근 대만을 방문해 여러 차례 김씨를 만나 귀국을 설득하는 등 공을 들였다. ‘SK 기획체포설’도 흘러나오는 이유다. 김씨가 증인으로 채택돼 법정에서 “내가 최 회장 몰래 선지급금 450억원을 횡령한 주범”이라고 주장한다면 최 회장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물론 정반대 해석도 가능하다. 김씨가 최 회장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독(毒)이 될 수도 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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