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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노병들, 공사생도들과 뜨거운 포옹 … "두고 온 자식 눈에 밟혀"

탈북 국군포로 23명이 지난달 22일 충북 청원군 공군사관학교 훈련장에서 전투복 차림의 공사 생도들과 만났다. 일부 용사들은 생도들에게 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청원=프리랜서 김성태]

6·25 정전 60주년(7월 27일)을 며칠 앞두고 있던 지난달 22일 오전 8시. 아침부터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서울 삼각지 전쟁기념관 주차장에 ‘6·25 참전용사’ 표시가 새겨진 모자를 쓴 80대 국군포로들(평균 83세)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출발 예정 시각은 오전 9시30분이었지만 대부분 1시간30분 전에 도착했다. 50년 이상 북한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몸에 밴 단체생활 습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달려 나오게 한 것은 또 다른 힘이 작용했다.

비정부기구(NGO)인 북한인권정보센터(소장 윤여상) 산하 국군포로정착지원센터가 탈북한 국군포로 23명을 초청해 1박2일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국방부의 위탁을 받은 이 센터가 6·25 정전 6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공군사관학교·세종시 등을 방문하는 일정을 마련했다.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탈북 국군포로의 단체 여행을 본지가 1박2일간 동행하면서 이들의 사연과 근황을 들어봤다.

윤여상 정보센터 소장은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북에서 신분 차별과 거주이전 통제를 심하게 받은 국군포로들은 여행 욕구가 유독 강하다”고 전했다. 여행은 자유를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수단이어서다. 실제로 국군포로 H씨는 “어제 상경해 딸네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말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1994년 탈북 국군포로 1호였던 조창호 당시 소위(예비역 중위로 전역·2006년 사망)를 비롯해 지금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입국했다. 80대 국군포로들의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2011년부터는 신규 귀환자가 없다. 올해 3명을 비롯해 29명이 숨지고 51명이 생존해 있다. 10여 명은 강제노역 후유증과 노인성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이번 여행에는 수도권에서 15명, 남부 지방에서 8명 등 모두 23명이 함께했다.

국군포로지원센터 행사 언론 첫 공개

귀환 국군포로들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그림 앞에서 정웅 중위의 설명을 듣고 있다.
  버스 안에서 귀환 용사들이 털어놓은 사연들은 절절했다. 불과 16세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은 하나였다.

 L씨는 “신체검사라고 해야 ‘앞으로 걸어보라, 팔을 들어보라’가 전부였다. 장애인이 아니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다”고 회고했다. 일주일, 길어야 열흘의 초단기 훈련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다 보니 포로가 될 위험이 높았다. 실제로 K씨는 전쟁 발발 엿새 만에 포로가 됐다.

 정전 협상이 지연되면서 전쟁 막바지였던 53년 7월에 포로가 된 경우가 특히 눈에 많이 띄었다. 정전을 불과 14일 앞두고 포로가 된 O씨(83)가 대표적 경우다. 그는 지금도 53년 7월 13일 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날 6·25전쟁 최후의 전투로 불리는 금성지구전투 현장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강원도 화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금성지구전투에서 중공군은 12개 사단 23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인해(人海)전술로 우리 군에 총공세를 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반발 차원이었다.

 “13일 저녁에 중공군이 축포 쏘듯 계속 포를 쏘았다. 정전을 주장하던 적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당시 6사단 소속이던 O씨는 전투 와중에 가슴과 다리에 총을 맞았다. 지금도 다리에는 총알이 관통한 상처가 뚜렷하다. 포로가 됐지만 정전협정으로 곧 풀려날 줄 알았던 O씨는 이후 55년간 북한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당시 이승만정부가 정전협상을 보름만 일찍 타결했어도 내가 55년간 북한에서 천대받으면서 강제노동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O씨는 한숨을 쉬었다.

 O씨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돼지처럼 살았다”고 참상을 증언했다. 함경북도의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O씨는 2008년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다시 밟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내가 먼저 나왔지만 노친(아내를 뜻하는 북한말)과 아들·딸은 아직 북한에 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됐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1박2일간 23명의 용사들은 모두 네 끼 식사를 함께했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밥그릇을 다 비웠다. 극도의 굶주림을 경험해봤던 이들이라 그런지 음식 앞에서는 특히 경건했다. O씨는 “북쪽에서는 없어서 못 먹지만 남쪽에서는 먹기 싫어 굶는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의 첫 공식 행사는 공군사관학교(교장 이영만) 방문이었다. 오후 1시25분 충북 청원군에 자리한 캠퍼스로 진입하자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퍼졌다. 생도들이 소형 태극기를 흔들며 영웅들을 맞이했다. 섭씨 33.4도의 폭염을 비웃을 정도로 환영의 열기가 뜨거웠다.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던 K씨는 “간단히 견학만 한다더니 무더위에 수백 명이 이렇게 크게 환대해주니 가슴이 찡하다”며 감격해했다.

 이영만(공군 중장) 교장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들을 환영한다”며 “6·25가 끝나지 않은 만큼 힘들었던 용사분들의 과거를 후배들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귀환 국군포로를 대표한 L씨는 “국군포로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만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장은 “아직도 북에 남아 있는 용사분들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2인1실로 꾸며진 생도 내무반 모형을 보던 G씨는 “이 정도면 호텔 같다. 우리가 군 생활하던 시절보다 100배는 좋아졌다”고 말했다.

 3학년 생도들의 화생방훈련도 참관했다. 용사들은 생도들과 만나자 포옹하고 손을 맞잡았다. 특히 서로 어깨를 주물러 주는 정겨운 장면도 연출됐다. N씨는 손자뻘인 생도들에게 “북한이 핵을 개발한 것은 남한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즉석에서 안보 교육을 실시해 눈길을 끌었다. 이형석 3학년 생도는 “말로만 듣던 선배님들을 직접 만나니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제2의 이산 … 우울증 겪는 경우 많아

  국방부에 따르면 국군포로들에게는 정부 차원에서 각종 지원이 이뤄진다. 입대 당시 대부분 사병이었기 때문에 50여 년 만에 귀환하면 하사(현 부사관)로 전역 신고하고 계급에 해당하는 누적 보수를 받는다. 국방부는 억류기간의 보수(수당 포함)를 포로 등급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눠 지급한다. 이 금액이 평균 3억1000만원이다. 종전에는 복무 기간에 못 받은 보수를 일시불로 전액 지급했지만 최근엔 5년으로 나눠 매월 지급한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빼내주겠다”는 탈북 브로커와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군인연금법에 따라 연금도 차등 지급된다. 숨질 때까지 월평균 138만원이다. 이를 일시불로 환산하면 1억2000만원이다. 주거지원금은 등급에 따라 일시불로 1억4000만∼2억2000만원이 지급된다. 80대 고령인 국군포로의 건강을 고려해 연간 1000만원 한도에서 의료비도 지원된다. 모든 지원을 합하면 국군포로는 1인당 평균 5억9000만원에 상당하는 지원을 받는다. 장교의 경우 8억원대다. 다만 북한 정권에 한때 동조한 경우 일부 감액된다.

  억대 지원금이 탈북 국군포로들의 잃어버린 50여 년을 모두 다 보상해주지 못한다. 여행 첫날 저녁 대전 D관광호텔 연회장에 마련된 여흥 시간에 용사들은 한 맺힌 사연을 노래로 풀어냈다. 선택한 애창곡에는 ‘고향’과 ‘부모형제’라는 공통분모가 놓여 있었다. L씨는 가요 ‘머나먼 고향’을 열창했다.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천리타향 낯선 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 하늘을 달려갑니다’.

 노래를 마친 L씨는 “53년간 북한에서 살면서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얼마나 고향 관련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며 감회에 젖었다. 이날 밤 노래는 ‘가거라 삼팔선’ ‘돌아와요 부산항에’ ‘전선 야곡’ ‘대지의 항구’ 등으로 이어졌다.

 이튿날 오전에 단체로 건강 상담을 받고 천연기념물센터 견학에 이어 세종시 방문을 끝으로 1박2일 여행을 마쳤다. 귀경길에 한 노병에게 ‘지금 행복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는 “아들·딸이 저쪽(북한)에 있어서 늘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고향을 찾은 대가로 아내와 자식들과 생이별, 즉 ‘제2의 이산’이 이들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 어렵게 북쪽 혈육과 편지로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

 신효선 지원센터 상담팀장은 “귀환 국군포로들을 개별 상담해보면 고향에 돌아온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분이 많다”며 “남한 사람들과의 소통이 힘들어 소외감을 호소하고 우울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사선을 넘고 넘은 역전의 용사들도 세월 앞에선 장사가 아니다. 지원센터 상담사들이 전국 각지를 방문하고 전화로 문안 인사를 한다고 하지만 한계는 있다.

 윤여상 소장은 “올 초에 돌아가신 국군포로의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조문객이 너무 없었고 조화조차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영웅들의 마지막 길이 너무 쓸쓸하다는 것이다. 국군포로의 거주지 관할 부대와의 결연 사업 등 관심을 높이는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청원·대전·세종=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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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