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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문자향과 서권기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지루한 장마는 끝물인 듯싶은데 본격적인 무더위는 이제 시작일 듯하다. 어디론가 훌쩍 더위를 피해 떠나면 좋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서책을 베개 삼아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특히 도록(圖錄)이나 화첩(畵帖)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언젠가 찾아갔던 전시회의 도록이나 화첩을 뒤적거리며 복습 겸해 보는 것도 새롭다. 몇 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했던 ‘능호관 이인상 탄신 300주년 기념전’ 도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 까다롭기 그지없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당대에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던 재주 많은 이들을 제치고 유독 높이 평가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능호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다. 추사는 능호관을 가리켜 “문자기(文字氣)가 있으니 이를 보면 ‘문자기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깨칠 수 있다”고 했다. 능호관이 스물아홉 살 되던 해인 1738년에 그린 수석도(樹石圖)의 오른쪽 하단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수한이수(樹寒而秀) 석문이추(石文而醜)’ 즉 나무는 차되 빼어나고 바위는 문채가 있으되 거칠다는 뜻이다. 그림 속 나무는 추위에도 푸름을 잃지 않은 채 빼어나고 바위는 거칠지언정 그마저 무늬 되어 빛난다!

 # 예부터 사람들이 추구한 바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이르길 “큰 기교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오히려 좀 서툰 것 같은 데서 더 크고 깊은 울림이 나온다는 역설이 힘을 얻는다. 결국 옛 선인들은 매끈한 것(巧)보다 서툴고 거친 것(拙)을 더 멋스럽게 본 것이다. 고졸(古拙)한 멋이란 것도 여기서 발원하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예부터 극상의 미는 담박(澹泊)한 것이지 농염(濃艶)한 것이 아니다. 맑고 담박한 것은 오래가고 짙고 농염한 것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 추사가 유배 중에 아들 상우에게 보낸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근본이다.”(완당전집, 제7권 ‘잡저(雜著)’) 문자향이란 말 그대로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를 말하고 서권기란 책에서 나오는 기운을 이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은은히 풍기는 묵향(墨香)이나 서가에 꽂힌 서책의 위엄(威嚴)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분명 향기와 기운을 이르지만 냄새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모름지기 만 권의 독서량이 있어야 문자향이 피어나고 서권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려면 먼저 그 사람됨이 바탕에서 우러나야 한다. 사람됨이 바탕에 없이 독서와 기량만 쌓이면 그것이 때로는 문자향이 아니라 문자욕(慾)이 될 수 있고 서권기가 아니라 서권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능호관의 그림 중 압권은 역시 검선도(劍僊圖)가 아닐까 싶다. 소나무를 뒤로한 채 머리엔 아무렇게나 내두른 건(巾)을 얹고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을 나부끼며 정면을 응시하는 선인! 그의 옆에는 보일 듯 말 듯 칼 한 자루가 놓여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 “중국인의 검선도를 모방해 그려 취설옹에게 바친다(倣華人劍僊圖 奉贈醉雪翁)”는 구절이 있어 이 그림의 주인공을 검을 찬 신선 여동빈(呂洞賓)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취설옹 유후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누군들 어떠하리. 검선 여동빈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에겐 칼이 세 자루 있다. 번뇌를 끊는 칼, 분노를 끊는 칼, 색욕을 끊는 칼.” 그렇다. 검선도의 칼은 세상을 향해 분노하며 남의 명줄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칼이 아니다. 자기를 다스리기 위한 칼이다. 이런 마음의 칼을 자신의 자리 옆에 놓아두고 있노라면 열대야에 뒤척거릴 일도 없이 이 무더위마저 단칼에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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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