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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누구나 방관의 다리에 설 수 있다

이규연
논설위원
지난해 봄, 오원춘 살인사건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오가 젊은 여성 행인을 집으로 끌고 들어가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범죄 행각 자체보다 더 쇼킹한 것은 피해 여인이 숨지기 전 112에 신고해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도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 책임을 지고 조현오 경찰청장 등 무궁화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여인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주변의 목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명을 듣고도 부부싸움인 줄 알고 그냥 흘려보냈다.

 당시 보도국 간부였던 필자 역시 사후(事後) 방관자였다. 오가 체포될 무렵, 경찰이 늑장 대응했다는 정황이 제기됐는데도 한동안 주목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범행을 막지 못했다”는 경찰의 주장을 그냥 받아들인 탓이다. 고백하건대, 실수의 밑바닥에는 “경찰이 모든 신고를 다 경청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안이한 생각이 깔려 있었다. 잠깐 정신줄을 놓은 사이 방관의 구조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자살방조죄가 아닐까-. 최근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씨의 투신 사망이 만든 논란이다. 다리에서 뛰어내릴 때 옆에서 지켜봤던 회원·기자의 행동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경찰은 일단 자살방조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자살은 처벌 가능한 범죄가 아니다. 자살을 부추겨도 벌할 수 없는 허점이 생긴다. 그래서 법은 자살방조죄를 따로 두었다. 경찰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 죄목으로 현장 목격자들을 엮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성씨가 투신을 예고했을 뿐 자살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도구를 준비해 주거나 자살을 독려하는 등의 명백한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목격자들은 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방조죄는 아니더라도 짐은 여전히 남는다. 성씨의 투신 퍼포먼스는 남성권익 옹호단체에 지원을 꺼리는 기관과 세태에 대한 항의였다. 우리 사회 일부는 그 필요성에 동의한다. 표현 방식이 돈키호테적이라도 정부부처·지자체는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정책적인 고려 없이 뒷짐만 지고 있었다. 경찰은 남성연대에 찾아가 한 차례 투신을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일 투신”이라고 트위터에 결행일을 밝혔으면 성씨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어야 했다. 사고 현장에 경찰은 없었다. 투신의 위험성을 알고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은 현장 목격자들과 함께 그들은 모두 도덕적 방관자였다.

 방관자 효과라는 게 있다. 목격자가 많으면 책임감이 분산돼 반(反) 인륜적인 행위를 보더라도 방치하는 심리현상이다.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제노비스 사건에서 비롯됐다. 1964년 주택가에서 제노비스라는 여인이 강도에게 살해됐다. 30분 넘게 진행된 범죄행각을 자기 집 창가에서 지켜본 사람은 38명. 어느 누구도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다. 최근에도 영화 ‘38인의 목격자’가 나올 만큼 현대사회의 냉혹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방관자 신드롬은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일종의 문턱 현상이다. 전통적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고개를 든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자기보호 심리도 커진다. 자유의 방패를 든 구경꾼들은 주변의 비명에 주목하지 않는다. 무정(無情)도시가 탄생하기 십상이다.

 무정도시의 문턱을 넘어서야 성숙한 선진사회는 있다. 그곳으로 가려면 구경꾼 신드롬이 넘실대는 위험한 강을 건널 튼튼한 교량, 새로운 공동체 질서가 필요하다. 그런 다리의 교각은 다름 아닌 경청(傾聽)문화다. 주변의 불의와 곤경을 잘 살피는 기본이 갖추어져야 방관의 벽을 뚫고 진격할 수 있다. 경청 습관이 한 번의 가르침으로 생기면 오죽 좋으랴. 모든 게 노동의 결과다. 교육·실천이 되풀이돼야 우리의 뇌 속에 경청의 회로가 생긴다. 남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 얘기도 남에게 들리지 않을 때가 온다. 우리는 누구나 방관의 다리에 설 수 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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