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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115·끝> 세연정 (洗然亭)

2007년 새해를 맞았다.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한 내 입장을 밝혀야 했다. 나는 2주일 동안 칩거하며 장고에 들어갔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핵 실험을 했다. 내 지지율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 호남인으로서 영남에서의 25% 지지 없이는 수학적으로 당선이 어려웠다. ‘보수의 잃어버린 10년’ ‘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이란 정서가 강했다. 영남에서 내 지지율은 급락했다. 나는 정치적 구심력을 상실했고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대선 출마의 뜻을 접기로 했다.



대선 출마 꿈 접었다
차 돌려 남해안으로 보길도서 마음 씻고 …

 2007년 1월 16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동숭동 집에서 나오는 골목부터 지지자들이 나를 막아 섰다.



 “대선 포기는 안 됩니다. 기자회견은 절대 안 됩니다.”



 그들은 소리쳤다. 실랑이 끝에 간신히 차를 탔다. 내 사무실이 있는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회견장이 있는 1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지자들과 취재진이 얽혀 있었다. 수십 명이 나를 둘러쌌다. 지지자들이 “대선 포기는 무효”라고 외쳤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2007년 1월 16일 서울 연지동 여전도회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고건 전 국무총리. 그는 대선 출마 포기 회견을 하려 했지만 지지자들이 저지했다. [중앙포토]
 김덕봉 전 국무총리 공보수석에게 기자회견문을 대신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기성 정치권의 벽이 지나치게 높아 저로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불출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지하층에 주차돼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기사에게 말했다.



 “남해안으로 갑시다.”



 차 안에서 50여 통 전화를 했다. 미처 상의하지 못한 후원자들에게 불출마 이유를 설명했다.



 6~7시간을 달렸을까. 나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경상남도 통영시였다. 한산도에 가려고 했지만 배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세병관(洗兵館)을 찾았다. ‘병기와 말을 씻어 두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세병관을 나와 강진 고려청자 도요지 전시관으로 향했다.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전시관 안에 들어갔다.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남도지사 시절 청자 도요지를 복원하는 기공식에서 삽을 들고 있는 젊은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숨기가, 잠행하기가 참 어렵구나’ 생각했다.



 다음 여정은 보길도였다. 고산 윤선도가 지은 정자 하나와 마주쳤다. 세연정(洗然亭)이었다. ‘자연으로 마음을 씻으라(然洗)는 뜻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3일을 남해안에서 보내고 상경했다. 집 근처 마로니에 공원에서 지지자 500여 명이 “돌아오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1월 20일 전화가 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었다. 그와 대학로 중국집 ‘진아춘’에서 만났다.



 “불출마 뜻을 번의해 주십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입니다.”



 DJ는 그때 처음 나를 지지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다.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대안 정당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기득권을 버리고 원탁회의를 제안했지만 기성 정치권의 호응이 없었습니다.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업 정치인이었다면 ‘고맙다’고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었다. 국민의 지지에 부응해야겠다는 소명의식에 정치를 시작했을 뿐이다. 열린우리당, 민주당에 들어가 공천 지분권이나 즐기면서 구태 정치에 몸을 담그기는 싫었다.



 사실 낙선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성 정당의 후보로 출마해 짐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당을 혁신하고 새 정치를 위한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조건이 갖춰진다면 말이다. 그 추동력은 차차기 대선 후보여야 가질 수 있었다. 5년 후인 2012년 나는 만 74세가 된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도 만 73세였다. 차차기 대선은 나에게 노욕(老慾)이었다.



 언론은 ‘새 정치를 표방한 제3후보의 정치적 좌절’ ‘권력 의지가 약한 비정당 정치인의 중도하차’라고 했다.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1월 21일 늦은 밤. 추위가 매서웠다. 집 앞에 10여 명 시위대가 농성을 하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밖에서 밤을 새우게 둘 수 없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다미’라는 집 근처 작은 국숫집으로 함께 갔다. 소주와 국수로 몸을 데웠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기성 정당에 들어가 출마해도 호남인으로서 수학적으론 당선이 불가능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반문했다.



 “DJ는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 DJ 때는 이인제 후보가 있어 가능했던 겁니다.”



 그들을 돌려보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눈을 감았다. 공인으로 보낸 40여 년도 함께 머리를 스쳐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운명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끝>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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