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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한·일 관계 '흐림, 때때로 비'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한·일 관계에 대해 ‘맑음, 가끔 흐림’ 정도면 좋겠다고 표현한 이는 작가 한수산씨다. 그러나 요즘 양국관계는 맑고 가끔 흐린 정도가 아니라 ‘흐림, 가끔 비’다. 아니, ‘흐림, 가끔 폭우’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역사·영토를 둘러싼 오랜 갈등이 최근 들어 제대로 ‘장마철’을 맞았다. 북한 문제가 불거질 때 한국 매스컴에 단골로 등장하던 ‘한·미·일 상호공조’란 문구는 어느 결에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빈자리를 꿰찬 용어가 ‘한·미·중 공조’다.

 양국의 갈등 양태는 거의 전방위적이다. 정상회담은 기미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인터넷상에서의 감정싸움은 민족주의의 ‘주의(主義)’라는 말에도 어울리지 않게 치졸한 수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길에 일본의 역사인식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자 일본 쪽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비판받으면 누구나 서운한 법”이라며 입이 부었다. 외교장관 간 첫 만남을 앞두고 일본 관방장관이 “통화스와프 계약을 연장하지 않아 회담이 앞당겨졌다”고 말하니 회담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나흘 전 서울에서 열린 정전 60주년 기념식에 일본은 초대받지 못했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양국 지한파(知韓派)·지일파(知日派) 정치인 그룹의 몰락이다. 정치에 의한 관계 복원력의 실종이다. 한일·일한 의원연맹 연례 모임은 지난해 열리지 못했다. 재작년 서울에서 총회를 열었으니 작년은 도쿄 차례였는데 불발됐다. 우리 대선 일정이 급했다지만, 실제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관련 발언 파문이 수습되지 않아서였다.

올해 양국 의원연맹 총회도 아직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대신 냉기류만 흐른다. 무려 10년 동안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지낸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지난해 10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일본의 독도 도발 비판에 앞장선다. 정치인 간에 대외관계에서 일종의 분업(分業)이 필요한데, 지금 한·일 정계엔 분업이고 배려고 다 팽개친 모습이다.

 이달 18일 도쿄에서 열린 주일 한국대사관 새 청사 개관식엔 우리 측 한일의원연맹 회장·회장대행이 가지 않았다. 개관식에 참석했던 김수한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은 “아무리 국회 일정이 바빴다지만 문제 아닌가. 지금은 양국 공히 의원연맹 기능이 마비 상태”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나마 몇 년 전까지는 속 깊은 대화 창구가 남아 있었다. 독도 주변에 대한 일본의 수로 측량 계획이 큰 외교문제로 번졌을 때 우리 측 문희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일본의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대화 파이프 역할을 한 전례(2006년)도 있다. 지금은 아니다. 국회 의원연맹 관계자와 함께 일본어가 되는 국회의원을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니, 김태환·길정우·심윤조·민병주(새누리당), 이낙연·강창일(민주당) 의원 등 채 열 손가락을 채우기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문제가 아니다. 영어로 해도 되고 통역을 써도 된다. 어쨌든 대화가 중요한데, 지금 분위기에선 요원하다. 게다가 한국 정치인에게 일본은 그 나라 국경일 기념식에만 참석해도 자칫 입방아에 오르는, 정치적 부담이 큰 나라다. 굳이 나서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다.

 크게 보면 한·일 관계는 대전환기다. 서로를 잘 아는 세대는 막후로 사라지고 신세대가 다수다. 과거의 밀실정치는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틀을 세워야 하는데, 상호 이해는커녕 기존의 오해만 더 증폭되는 모양새다. 아베 총리가 올랐던 자위대 비행기에 쓰인 ‘731’은 한국·중국에선 극히 민감한 숫자다. 참모진의 무지·무신경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에게 욱일승천기는 제국주의라기보다는 그냥 응원 깃발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진보적인 아사히신문의 사기(社旗)도 비슷한 디자인이다. 그러나 한국인 관중은 ‘일제’로 받아들인다.

 특수관계에서 보통관계로 이행 중인 한·일 관계에서는 정치인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양국 간에는 현안이 많다. 어느 한두 가지가 나머지 현안들을 다 덮어버리는 비대칭·과잉대표 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고 긴 안목으로 ‘관리’할 문제가 따로 있는 법이다. 해결할 것을 관리만 하려 해도, 관리할 것을 당장 해결하려 들어서도 곤란하다. 많은 한국인은 일본이 대한(對韓) 직접투자액(2012년 45.5억 달러)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과거와 반대로 한·일 관계는 정치가 경제 발목을 잡고, 관(官)이 민(民)을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개선돼야 하지 않겠나. 내일부터 광복절과 경술국치일이 낀 8월이다. 폭우가 더 쏟아질지, 긴 장마 끝에 햇살이 비칠지는 두 나라 지도자들이 하기에 달렸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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