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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 만능 안 돼 … 의대·공대도 인문학 35학점 따야 졸업"



우리 사회에 ‘인문학’은 여전히 낯설다. 지성과 학문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은 홀대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인문학’이란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긴 했지만 인문학에 대한 본질적 접근은 드물었다.

[대학의 길, 총장이 답하다] '인문교육' 실험 경희대 조인원 총장



 그사이 대학은 다분히 취업준비기관으로 변한 모습이다. 정부의 대학평가도, 학부모와 수험생의 대학 선택기준도 ‘취업’이 최우선이다. 지식은 당장 써먹을 수 있어야 하고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대학의 사명이 전문가나 기술자를 키워내는 게 유일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경희대 조인원 총장은 이 같은 통념에 반기를 든다. 당장 현실에 쓰일 수 없어도 미래의 터전이 되고 디딤돌이 될 인문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단편적인 지식을 주기보다 지식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사고의 그릇을 키워주는 일,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난 17일과 23일 두 차례 경희대 설립자인 고(故) 조영식 박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집무실에서 조 총장을 만났다.



 - 왜 인문학인가.



 “대학은 말 그대로 ‘큰 학문(大學)’을 가르치는 곳이다. 스스로 답을 찾게 생각의 지평을 넓혀줘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은 대학이 아니어도 배울 수 있다. 대학에선 복잡다단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어릴 때 인성교육이 특정 가치규범을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인문교육은 스스로 고민해 자신의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 학교선 학생 스스로 답 찾게 가르쳐



 - 취업이란 현실 앞에 실용교육이 강조되는데.



 “사회가 전문가만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조직에 친화적이고 남을 배려하며 협력할 줄 아는 사람도 필요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유연한 상상력을 갖춘 사람도 있어야 한다. 실용교육만으론 이 같은 인재를 키워내기 어렵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전문가의 의미도 달라졌다. 지식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대안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전문가다. 의사도 엔지니어도 철학과 문학, 역사와 예술을 공부해야 한다.”



 인문학을 얘기하며 조 총장은 현대사회를 중세의 마지막 시대에 비유했다. “물질주의가 삶의 기준이 되고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공동체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문교육은 우리 사회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대학의 시대적 사명입니다.” 조 총장은 2011년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설립해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희대생들은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시민교육 등 총 35학점의 교양강좌를 이곳에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조 총장은 이런 인문학 실험을 ‘21세기 르네상스’라고 표현했다.





전문교수 80여 명 인문학 칼리지 3년째



 -‘21세기 르네상스’는 무슨 뜻인가.



 “르네상스는 중세시대에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었다. 지금 역시 휴매니티(humanity)가 중심이 되는 사회적 가치를 재정립해야 할 시기다. 대신 21세기에는 개개인의 인간성을 되찾고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공동체 가치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타인과 자연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세계, 문명에 대한 이해 등이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들이다.”



 -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3년째인데 성과는.



 “학생들이 인문학을 어려워하면서도 중요시해야 할 이유는 ‘세상엔 정답이 없다’는 거다. 중·고교까지는 정답이 있는 공부만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남다르게 생각하며 창의성을 길러야 한다. 처음엔 생소한 철학과 문학을 접하면서 학생들이 어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독서·토론 등 모임을 만들고 세미나도 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학생들 스스로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바라보는 눈이 생기고 내면적으로 성숙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다.”



 -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기존의 교양교육과 뭐가 다른가.



 “교육만 담당하는 각 분야 전문가 80여 명이 전담교수로 있다. 이들은 역사와 철학, 우주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문과 기초학문을 가르친다. 또 여러 교수가 함께 팀 티칭도 준비한다. 예를 들어 ‘빅뱅에서 인간까지’ 같은 과목이다. 우주의 탄생이라는 물리학적 접근에서 시작해 역사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진화의 드라마를 거쳤는지 교육한다. 국내외 석학들이 온라인을 통해 이런 주제들을 강의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강좌를 개설할 계획이다.”



 경희대는 세계적인 석학들의 초청 강연에도 활발하다. 2010년 설립자인 조영식 박사의 호를 따 ‘미원(美源) 렉처(lecture)’라는 특강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10여 명의 세계적인 석학이 경희대에서 강연했다. 역사학의 권위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석좌교수, 미국 정치학회장인 피터 카젠스타인 코넬대 석좌교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과 로베르토 웅거 등이다. 조 총장은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인류사회에 기여한 석학들의 강연은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큰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유연한 사고 갖춘 진짜 전문가 길러내



 - 국내에서도 ‘석학’으로 불릴 만한 유능한 교수들을 키우는 일이 중요한데.



 “학문은 창작 행위다. 남의 것을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긴 호흡이 필요하다. 논문 편수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간 질 높은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지원할 생각이다.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 체계를 다듬은 저서도 많이 쓰도록 해야 한다. 연구의 질적 수준을 교수 평가에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 인문학이 바탕이 된 교육을 하려면 학생 선발 기준도 남달라야 하지 않을까.



 “성적 중심의 줄 세우기 입시는 지양한다. 만들어진 실력이 아니라 학문적 가능성과 사람 됨됨이 등을 갖춘 인재를 선발토록 입시 개선안을 연구 중이다. 사고의 폭과 깊이, 학문과 삶에 관한 열정을 갖춘 학생들을 뽑도록 입학사정관제를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 21세기 대학의 미래상은 무엇인가.



 “대학은 ‘큰 배움의 장’이다. 연구자는 학문적 성취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의 삶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학생은 배움을 실천하면서 개인과 사회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는 창조적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거듭나야 한다. 학문을 통해 인간과 사회, 문명의 더 나은 미래를 이끄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자 소명이다.” 만난 사람=김남중 사회1부장



정리=윤석만·이한길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조인원 총장은=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고와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88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희대 NGO대학원장, 펜실베이니아대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경희대 설립자인 고(故) 조영식 박사의 차남으로 2006년 12월 총장에 취임했다. 99년 서울NGO 세계대회 공동추진위원회 한국 대표, 유엔밀레니엄NGO포럼 운영위원 등으로 일했다. 정치학자지만 신학과 철학·역사·자연과학 등에도 조예가 깊어 ‘통섭’의 학자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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