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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의 전쟁②] 1950년 한국전쟁





맥아더, 한강전선 시찰 다음날 대만서 장제스 만나

두 장의 지도가 있다. 하나는 연합군이 준비한 일본 분할 점령계획이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빠르게 남진했다. 이와 함께 장제스(蔣介石)의 중국이 일본 시코쿠섬을 점령할 기회도 사라졌다. 다른 지도는 그날 밤 딘 러스크 미군 대위가 펜타곤의 한 휴게실에서 30분 만에 한반도에 그은 38선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5년 후 6월 25일 38도선 전역에서 소련제 T-34 전차의 포신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한국전쟁의 시작이다. 26일 저녁 워싱턴 블레어 하우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세 가지 제안이 통과됐다. ▶극동 주재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한국을 지원할 권한을 위임한다. ▶미 공군에 한국 체류 미국인 철수와 북한군 폭격 명령을 내린다. ▶미 7함대를 즉각 대만 해협에 파견, 중국 공산당의 대만 공격을 저지한다.







29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호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뚫고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한강 남쪽 최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는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그의 머리 속에는 작전 구상이 이미 끝나 있었다. 이튿날 맥아더 장군의 바탄호가 다시 이륙했다. 기수는 대만을 향했다. 맥아더를 만난 장제스는 3만3000명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대만과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다. 10월 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호출을 받은 펑더화이(彭德懷)가 시안(西安)에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5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한국전쟁을 지휘할 사령관에 임명했다. 7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었다.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신분으로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압록강 북쪽에 이미 배치돼 있던 제40군의 한 병사가 시를 지었다.



“미제는 흡사 한 줌의 불씨와도 같이(美帝好比一把火)/한반도를 불태우고 중국까지 태우려 하네(燒了朝鮮燒中國)/중국의 이웃에서 재빨리 불을 끄세(中國隣居快救火)/한반도를 구하는 것이 곧 중국을 구하는 것이기에(救朝鮮就是救中國)”

10월11일 압록강변을 시찰하던 펑더화이가 마오에게 전보를 보냈다.



“…원래는 2개 군과 2개 포병사단이 먼저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압록강교가 폭파되었을 때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여의치 않고 자칫 전투 기회를 잃을 수 있어서 전체 병력(4개 군 3개 포병 사단)을 강 남쪽에 집결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19일 평양이 함락됐다. 바로 그날 중국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중국이 말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돕는다)’ 전쟁의 시작이다. 25일 양군이 처음으로 조우했다. 치열했던 운산전투가 시작됐다.



◇인해전술 아니라 ‘란체스터 법칙’ 적용



중국군은 한반도에서 인해전술을 구사하지 않았다. 인해전술이 아닌 현대 경영이론으로까지 각광받는 란체스터 법칙을 적용했다. 펑더화이는 란체스터 법칙을 실전에서 체득한 장수였다. F. W. 란체스터(Fredric William Lanchester·1868~1946)는 1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에 살았던 과학자다. 공중전에 관심이 많았다. 피아의 손실과 생존율을 살폈다. 중요한 법칙을 발견했다.



영국군 전투기(A) 5대와 독일군 전투기(B) 3대가 전투를 벌인다고 상상해 보자. 실전에서는 산술적 추정처럼 영국군 전투기 2대가 살아남지 않았다. 2의 제곱인 4대의 영국 전투기가 무사히 귀환했다. 이유는 이렇다. B국 전투기 B1은 A국의 전투기 5대 중 한 대를 겨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A1이 B1의 미사일을 맞아 격추될 확률은 1/5이다. A1은 B2, B3로부터도 같은 피격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A1의 피격 확률은 1/5*3, 3/5이다. A1~A5는 모두 동일하다. B국 전투기를 보자. B1이 A1으로부터 사격 받아 격추될 확률은 1/3이다. A국의 모든 전투기는 B국의 3대 중 한 대를 조준하기 때문이다. B1이 격추당할 확률은 1/3*5로 5/3이다. B1~B3가 모두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A와 B국의 피해 비율은 3/5:5/3이다. 통분하면 9/15:25/15로 9:25다. 결론적으로 A:B의 총 전력비는 25:9다. 초기 전력인 5:3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것이 현대전에서 총 전력은 투입 전력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란체스터 법칙이다. 란체스터 법칙은 전력 집중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예를 들어 10이란 전력이 있을 때, 이를 한꺼번에 투입하면 10의 제곱인 총 전력 100의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절반씩 둘로 나누면 5의 제곱*2로 50의 전투력밖에 거두지 못한다. 7:3으로 나누면 49+9로 58, 8:2의 경우 64+4=68의 효과밖에 거두지 못한다.



이를 한국전쟁에 대입해 보자. 펑더화이가 10월 11일 마오에게 보낸 전보에 담긴 전력 집중 방침은 그가 란체스터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중국군은 실제 전투에서 대부분 병력을 집중 투입했다. 제공권의 열세를 극복한 방법이다.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대규모 기습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당황했다. 합리화 논리가 필요했다. 중국의 야만성을 부각해 패퇴를 정당화시켰다. ‘인해전술론’이 횡행한 이유다.



◇첨단 기술 가르치는 군사학교 확대 계기



강한 적은 최고의 스승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적지 않은 교훈을 얻었다. 한국전쟁 이전 중국군은 재래식 유격전으로 단련된 비정규군의 집합에 불과했다. 한국전으로 중국은 ‘인민전쟁론’에 입각한 혁명군대로는 현대식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징병제, 계급제가 도입되고 계급별로 월급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첨단 무기에 충격을 받은 군 수뇌부는 소련의 도움으로 첨단 군사기술을 가르치는 군사학교를 도처에 세웠다. 1951년 1월 15일 류보청(劉伯承)은 난징(南京)에 해방군사학원을 세웠다. “현대화·정규화된 국방군 건설을 위해 분투하라”는 제사(題詞)를 보냈다.



교훈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흐루쇼프와 마오의 갈등이 초래한 중·소 갈등으로 인민해방군은 소련군 배우기를 그만뒀다. ‘선진적 사상, 위대한 영도, 단결된 대오만 있으면 누구와 싸워도 승리할 수 있다’는 ‘정신원자탄론’ ‘인민전쟁론’ 등이 다시 대세를 이뤘다.

올 7월 27일은 휴전 60주년이다. 당시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과 중국은 이미 전략적 동반자가 됐다. 역사는 최고의 교과서다. 한국전쟁은 반복돼선 안 된다. 역사의 직시는 그 출발이다.



※이글은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 발간하는 Chindia plus 2013년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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