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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문제 돕는 일본인 우에다 유스케씨 “식민주의 청산 한일 공동의 몫”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본사람이 왜 돕냐구요? 우리가 청산해야 할 역사의 몫이니까요.”



지난 4월 ‘위안부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팍(팰팍)에서는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강제위안부를 주제로 한 사진전이 열렸다.



미주 최초로 열린 이 사진전은 안세홍 작가가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10년이 넘게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그들의 피폐한 삶을 카메라에 담은 것으로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로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 안세홍 작가와 함께 한달여간 뉴욕과 뉴저지에 머물며 전시회와 강연 등의 행사를 도우며 함께 움직인 청년이 있다. 바로 우에다 유스케 씨였다.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위안부역사에 관한 망언을 늘어놓고 있지만 대다수 일본인들은 역사의 진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우에다 씨처럼 잘못된 역사를 자성하고 한일간의 진정한 우호를 위해 힘쓰는 의로운 일본인도 적지 않다.



우에다 씨는 20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에서 출간된 안세홍 작가의 사진집 출판기념 심포지움과 중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는 답사여행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적어도 두 번 놀란다. 안세홍 작가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인물이 일본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위안부 사진전’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전시회는 극우단체들의 압력으로 대관이 취소돼 소송까지 벌어지는 등 국제적인 파문이 일기도 했다.



SNS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우에다 씨는 안 작가에게 달려가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소송은 승소했지만 대관업체는 노골적인 방해책동으로 정상적인 전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에다 씨를 비롯한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사진전은 위안부이슈를 잘 모르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연일 많은 이들이 관람하는 등 성황리에 펼쳐질 수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안 작가는 우에다 씨에게 위안부 사진전을 널리 알리는 ‘겹겹프로젝트’를 함께 하자고 제안, 두 사람은 중국과 필리핀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는 여행에도 동행하는 등 실과 바늘의 관계가 되었다.



한국 대학원(연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어와 한국 역사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한 그는 “위안부 문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깊숙이 관여하게 된 것은 그때 이후였다”고 털어놓았다.



우에다 씨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위안부이슈에 대해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여성만이 아니며 보편적인 여성인권의 문제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단죄 등 역사청산에 관해서도 “깊은 숙고와 통찰력이 아쉽다”며 쓴소리를 했다. 그는 “기존의 한국사학에서는 친일파에 대해서 단죄하는데 그치고, 왜 그들이 일본식민통치에 가담하게 됐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로 일본 중의원에 당선된 박춘금에 대한 사례를 들었다. 박춘금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중의원을 역임한 유일한 조선인이다. 본래 정치깡패 출신으로 노동자 농민들의 반일사상을 탄압하고 소위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내세운 대표적인 친일파의 하나로 알려졌다.



해방후 ‘반민특위’에서 1급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반민특위가 이승만정부에 의해 와해돼 강제송환을 면하고 1973년 82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우에다 씨는 “우연한 기회에 한 재일동포 사회학교수가 쓴 논문에서 일개 깡패에 불과했던 박춘금이 어떤 식으로 일제식민지배에 논리에 동조를 하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실을 깨달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논문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박춘금이 중의원 당선후 국회에서 조선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발언을 계속했지만 일본관료로부터 돌아오는 발언은 선처하겠다는 말뿐이었다, 개선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점점 일본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면서 “박춘금의 사례를 보면서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는 식민주의를 청산하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뒤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사회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다음은 우에다 씨와의 일문일답.



- 안세홍 작가를 만나기전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니?



“거시적인 역사보다는 미시적인 민중사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일제시대를 겪었던 분들의 얘기를 직접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위안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관심이 있었고 언론이나 서적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지만 개인적으로 뭔가를 하기 시작한 건 안 작가를 만난 후부터다.”



- 안 작가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처음에 트위터를 통해서 안작가의 전시회를 열기로 한 니콘살롱이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기감을 느껴 달려가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제 언어(한국어) 능력을 높이 사주고 동참해달라는 안 작가의 부탁을 받게 됐다. 한국 유학을 계기로 식민주의 청산에 관심이 많았고 마침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여건도 제 등을 밀어줬다.”



- 안 작가와 함게 중국과 필리핀 등지에서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2012년 12월, 하상숙할머니와 박차순할머니를 뵙기 위해 중국 우한에 가게 됐다. 가기 전에는 제가 일본인인데다 남자이기도 해서 할머니들이 만남조차 거부하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막상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동안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다녀갔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갖고 계셨다. 제가 철이 덜 든 20대때 만나뵈었더라면 할머니께 그 당시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여쭤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용기가 안나더라. 말씀을 듣는 것도 정말 가슴 아프지만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가 다시 그 고통에 시달리시는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 필리핀에서도 현지 피해할머니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의 생활은 어떠했나?



“필리핀의 로라(따갈로그어로 할머니의 뜻)들을 찾아갔을 때는 일본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정부의 지원도 못 받으신 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로라들의 실태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알렸는데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한국사람들이 다른 나라 피해여성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게 아닌가 싶더라. 중국 상하이사범대학에 있는 중국 ‘위안부’ 자료관을 찾아갔을 때도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들은 찾아오는데 한국사람들은 거의 안 온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착잡한 심정이었다. 가해국인 일본 사람인 제가 외람된 말씀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위안부’의 최대피해국인 한국사람들도 다른 나라 피해할머니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



- 그간 일본과 한국 미국 등지에서 위안부사진전을 열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한일간의 역사는 분명 집고 넘어 갈 부분들이 많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이성적인 대응보다는 감정적인 문제로까지 보여지기도 한다. 사실 한국국민들은 물론, 미국에 계신 한인분들 대부분이 일본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만큼은 한일간의 역사 문제를 넘어 여성인권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는 ‘위안부’ 문제가 감정적인 이슈가 아니라, 전쟁과 여성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이번에 뉴욕과 뉴저지의 위안부기림비 3곳을 참배했는데, 미주 여러 곳에서 전개되는 위안부기림비 건립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나.



“현재 많은 지역에 기림비가 세워져 있고, 기림비건립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위안부’나 그와 관련된 사항, 예컨대 고노담화 등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감정적인 반응이 컸다. 심지어는 저에게 “너는 일본인 주제에 왜 왔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라고 심한 말을 하시는 분도 계셨다. 제 생각으로는 기림비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림비 건립을 통해 단체나 개인의 의견을 모으고, 지속적인 위안부 역사와 인권문제를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위안부’피해자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중국,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도 알아야 한다.”



-일본서 중의원으로 선출됐다는 친일파 박춘금을 어떻게 알게 됐나.



“한 재일교포 사회학교수가 쓴 박춘금에 관한 논문을 우연히 발견했다. 박춘금은 총독부관계자 등의 협력으로 도쿄 후카가와 선거구에서 조선인 최초로 일본 중의원의원으로 당선됐는데 논문은 의회록에 남겨진 국회에서의 발언을 통해서 그가 삼일운동후에 타이쇼천황이 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말한 일시동인(一視同仁, 일본인도 조선인도 같은 황국신민이니 차별없이 다루겠다는 뜻)이 언젠가 실현될 거라 굳게 믿으며 제도적인 차별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발언을 계속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관료로부터 돌아오는 발언은 선처하겠다는 것일뿐, 개선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지쳐가고 점점 일본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됐다.



일개 깡패에 불과했던 그가 어떤 식으로 일제식민지배에 논리에 동조를 하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실을 깨달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그 논문에 감명을 받았고 가해국 국민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식민주의를 청산하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뒤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역사사회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교수님께 그에 대해서 좀더 깊이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되돌아온 대답은 “그 새끼는 깡패야, 왜 쓸데없이 그딴 놈을 연구하냐”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기존의 한국사학에서는 친일파에 대해서 단죄하는데 그치고, 왜 그들이 일본식민통치에 가담하게 됐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무튼 교수님의 말씀은 제가 전공을 사학에서 사회학으로 바꾸는 큰 계기가 됐다. 그후 연세대학교 사회학대학원에서 일본을 거쳐서 왜곡된 형태로 식민지조선에서 널리 퍼진 서양정신의학이 조선의 sexuality를 어떻게 변용시켰느냐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일신상의 이유로 중퇴를 하게 됐지만, 아직도 관심은 갖고 있다.”



- 가족관계는 어떤가. 혹시 부모님께서 아들이 이런 일을 한다고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하지는 않으시는지.



“1남2녀중 장남으로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오사카에 살고 계시는데 제가 일하는 것을 반대는 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지난해 오사카에서 열린 안 작가 사진전에 찾아오셔서 “우리 아들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셨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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