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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별빛이 쏟아지는 땅 루르마랭에서 고독에 파묻히다

프로방스 마을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일은 마치 고향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편안한, 그러면서도 정감 어린 서정적 풍경 덕분이다. 한 그루 나무나 이름 없는 풀조차도 사랑스러운 곳.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예술인의 감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프로방스 와이너리 탐방 중에 한 작은 마을, 루르마랭(Lourmarin)을 찾았다.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스웨덴 한림원) 알베르 카뮈(1913~60)가 죽기 직전까지 살았고 지금 묻혀 있는 곳이다. 그의 영원한 스승이자 동반자인 철학자 장 그르니에(1898~1971)가 결혼(1928)하고 공부한(1930~31) 곳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에 오간 우정의 편지는 알려진 것만 235통에 이른다. 이 세계적 작가와 철학자의 말과 글과 생각은 내게도 오랜 시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올해는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인간의 실존에 대해 고민했던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21세기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선 과연 뭐라고 말할까.

알베르 카뮈 탄생 100주년, 생의 흔적을 찾아서

1 루르마랭 성, 장 그르니에는 로랑 비베르 재단의 도움으로 이 성에 머문 적이 있다. 2 카뮈의 거리에 있는 카뮈의 집 외관.
3 알베르 카뮈(사진 왼쪽)와 장 그르니에. 사진 책세상 4 카뮈의 묘지. 사진 책세상
스승이자 동반자 장 그르니에와의 인연 담긴 곳
여행을 하다 보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들을 되뇌어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있다. 기차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할 때나 낯설지만 왠지 정이 느껴지는 오래된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 이런 감정들이 특히 살아난다. 프로방스 마을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루르마랭을 산책하게 된 것은 햇빛이 뫼르소를 충동질했던 만큼이나 눈부시게 쏟아지던 어떤 날이었다.

중세시대에는 중요 요새의 역할을 했던 이 마을은 중간 부분에 높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어 주변 보클뤼스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뤼베롱 산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마을 골목골목에 있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오래된 분수들은 프로방스의 정취를 더욱 느끼게 한다.

중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초등학교 건물 앞에는 탁 트인 벌판 위에 멋진 성 하나가 보였다. 이 성은 요새로 쓰였다가 폐허가 되었는데 15세기 렌느 1세의 시종이었던 풀크 다구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16세기에는 프로방스 지역의 첫 르네상스풍 건물이 되었다.

그런데 성 내부에 거주 공간이 없었던 탓에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폐허로 변해가던 중 1920년 화장품을 생산하던 로랑 비베르가 사들여 성을 재건했다. 로랑은 1925년 죽으면서 로랑 비베르 재단을 설립하고 ‘과학·농업·예술·문학 아카데미’에 기증, 젊은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했다.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1930년 루르마랭의 이 재단에 기숙생으로 선발되어 이 성에 한 달 정도 묵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후 알제리로 떠나 철학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때 철학반 학생이던 열일곱의 알베르 카뮈를 만나 평생 문학과 철학의 동반자가 된다. 나는 그르니에가 쓴 『지중해의 영감』 한글 번역본을 프랑스 와인 기행을 쓰던 시절 카메라 가방 뒤에 항상 넣고 다녔다. 그러다 기차 안에서 또는 숙소에서 시간이 있을 때면 펴놓고 읽곤 했다. 이 책에서 그르니에는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냈다. 루르마랭 근처를 산책하면서 얻은 사색을 수려한 필체로 풀어내기도 했다.

5 프로방스의 전원 풍경 6 동네 표지판들 7 야채ㆍ소시지ㆍ치즈를 파는 가게
혼자 머물며 소설 집필하던 시골집
17년째 마을을 대표한다는 키 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시장님의 안내로 좁은 골목을 오르자 오래된 퐁텐(샘물이 나오는 곳) 뒤로 작은 교회 하나가 보였다. 시장님은 가져온 열쇠로 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주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벽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면서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광장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오는 골목 이름이 ‘알베르 카뮈의 길’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 교회 앞을 매일 지나다녔을 카뮈를 상상했다. 실제로 카뮈가 생애 최초로 구입한 집이 바로 이 길 중간에 있다. 하지만 아무런 표지가 없어 현지인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현재 카뮈의 딸(카트린 카뮈)이 살고 있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카뮈 전문가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최근 산문집 『여름의 묘약』(문학동네)에 따르면 이 아름다운 시골집은 원래 누에를 키우던 양잠장이었다. 지하실 하나, 1층에 거실, 아이들 방 두 개, 부엌이 있고 2층에는 큰 방 하나와 욕실과 침실, 지붕 밑에 다락방이 하나 있다. 이 집에 살며 카뮈 관련 원고작업을 진행 중인 딸 카트린 카뮈는 “아버지는 서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1958년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보클뤼스 지방에 체류하던 카뮈는 그해 가을 루르마랭의 이 집을 마련했다. 『이방인』으로 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직후였다. 그리고 그르니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루르마랭에서 괜찮은 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저도 선생님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지요=장 그르니에는 앙리 보스코의 소개로 루르마랭 마을을 알게 됐다. 그리고 28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곰곰 생각해 본 끝에 이 참한 집을 샀습니다.…”(1958년 9월 25일, 편지 226,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김화영 옮김, 책세상)

이에 대해 그르니에는 답장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친애하는 카뮈, 정말 기뻐요-루르마랭은 시미안에서 40킬로미터밖에 안 되지요. 그런데 그 집이 대체 어디 있어요? 마을 안인가요? 아니면 밖인가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집의 위치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요.”(58년 9월 29일, 편지 227, 그르니에가 카뮈에게)

카뮈는 보클뤼즈와 알제리, 파리를 오가면서도 소설 집필은 루르마랭의 시골집에 혼자 머물며 하곤 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편지 한 대목. “…이곳은 며칠 전부터 좋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일과 걱정거리뿐이었던 삼 개월을 보낸 후 드디어 평온과 고요를 다소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제겐 빵만큼이나 고독이 필요했습니다. 아니 차라리 고독은 제 개인적인 작업의 길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방책이었습니다.…”(59년 5월 8일, 편지 229,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고독은 그와 스승을 엮는 외로운, 그러나 따뜻하고 질긴 실타래이기도 했다. 그르니에가 첫 번째 산문집 『섬』(1933)으로 포르티크상을 받았을 때 카뮈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스승을 치하했다. “그분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수가 많고 가장 진심 어린 언어들 중의 하나인, 고독이라는 바로 그 언어를 말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인간의 고독과 절대에 대한 갈망 외에 다른 주제는 없습니다.”

『섬』이 출간됐을 때 카뮈는 그르니에를 만난 지 3년도 안 됐을 시기지만, 한창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에게 이 책은 ‘비밀스러우면서도 결정적인 영향’이었다. 카뮈는 이 책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딱 잘라 단언하지는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작품, 진리를 그저 가볍게 건드리고 지나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이 예외적인 작품을 우리는 찬미하는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카뮈는 60년 1월 4일 파리로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루르마랭 마을 묘지에 안장됐다. 59년 12월 28일 죽기 전 마지막 편지 글에는 우연히도 자동차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며칠 전에 어떤 경관이 제 자동차를 세우더니 제게 무슨 글을 쓰냐고 묻더군요(제 직업이 운전면허증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소설을 씁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강조하듯 다시 묻는 거예요. ‘애정소설입니까, 아니면 탐정소설입니까’라고요. 마치 그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반이죠 뭐.’ 곧 다시 뵙겠습니다. 자주, 아주 자주 선생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늘 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선생님과 가족분들의 건강을 빌며.” (편지 234,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나는 어쩌면 경관이 카뮈의 자동차를 세웠을 법한 큰길을 따라 걸어내려 갔다. 양쪽으로 상가 건물과 레스토랑이 있고 어김없이 작은 퐁텐들도 눈에 들어온다. 건물들은 많이 낡았지만 그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멋을 안고 있었다. 프로방스의 강렬한 햇빛을 반사해 주는 흰옷 가게,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또 다른 옷 가게, 신선함과 탐스러움을 보여주는 원색의 야채들….

햇빛은 골목과 대로를 선명하게 갈라 놓을 만큼 강했다. 나는 마을 산책을 마치고 처음 자리로 돌아와 지나온 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반세기 전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산책하던 카뮈와 그르니에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8 루르마랭 거리 풍경과 카페 9 프로방스 최대 와인협동조합인 마르농에서의 와인 시음
내면 깊은 곳 열정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힘
아무래도 프로방스는 인간에게 어떤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곳인 것 같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정을 부드럽게 자극해 기어코 들끓어 오르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대문호 알베르 카뮈를 머물게 했고 장 그르니에를 산책하게 한 것은 아닐까? 젊은 시절 카뮈의 사진을 보면 항상 담배를 물고 있다. 곁에는 레드 와인도 한 잔 놓여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분명 한적한 카페에 나와 앉아 프로방스 와인을 즐겼을 것이다. 그레나슈와 시라를 사용해 담배 향과 과일 향이 풍부한 이곳 와인을 즐기며 글을 구상하고 펜을 움직였을 것이다.

루르마랭을 나와 근처에 있는 마르농으로 갔다. 프로방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와인 협동조합 회사의 이름이기도하다. 이곳에서 나오는 아주 근사한 와인 ‘그랑 마르농(Grand Marrenon)’을 기울이며 다시 카뮈를 생각했다. 루르마랭 마을 어귀에서 본 카뮈의 연극 ‘최초의 인간’ 공연 포스터를 떠올렸다. ‘최초의 인간’은 그가 루르마랭에서 집필한, 죽을 당시 품고 있었던 미완성 원고였다.

예술은 영원했다. 대도시이든 이곳같이 산속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든 인간이 남긴 예술적 가치는 어디에나 영원히 존재하고 있었다. 살면서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술적인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오늘 같은 더운 여름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보며 프로방스 마을을 어슬렁거릴 수 있다면 난 아마 시인이 되어 있을 거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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