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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의 총성, 위안스카이 운명을 가르다

1910년 겨울, 동방잡지에 실린 위안스카이의 모습. 당(唐)대 산문가 유종원(柳宗元)의 시, 강설(江雪)의 마지막 구절인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외로운 배 위에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노인, 눈 덮인 차가운 강에서 혼자 낚시질하네)을 연상케 한다. ‘파사수조도(坡蓑垂釣圖)’라는 제목이 달린 이 사진은 짜이펑을 안심시키기에 족했다.[사진 김명호]
권력은 위험하다. 더 큰 권력의 비호를 받아야 유지가 가능하다. 권력의 세계는 도박판과 흡사하다. 자신을 몰락시킨 사람을 순식간에 중독자로 만들어버린다. 위안스카이도 그랬다. 대청제국의 권력 체제에 의해 쫓겨났지만 몇 년 후 한배를 탔고, 결국은 제국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1>

위안스카이 축출에 성공한 짜이펑은 후임 직례총독에 돤팡(端方·단방)을 임명했다. 자신감이 생겼던지, 몇 달 후 돤팡의 직위도 박탈해버렸다. 1910년 2월 주중 영국공사였던 조르단(John Newell Jordan)이 본국 외무성에 보낸 ‘1909년 중국정세 보고서’가 남아있다.

“1909년은 가장 영향력이 컸던 진보적 정치가 위안스카이의 해직으로 시작됐다. 위안스카이 다음가는 자유주의자 소리를 듣던 돤팡의 해임으로 끝을 맺었다. 직례총독부 소재지 톈진의 명사들은 행동으로써 섭정왕 짜이펑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돤팡이 톈진을 떠나는 날 역전 마당에서 성대한 고별 의식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상인들이 나눠준 돤팡의 사진을 보며 위안스카이의 근황을 더 궁금해 했다고들 한다. 짜이펑의 황제놀이는 오래갈 것 같지 않다.”

관직에서 물러난 돤팡은 잠복해있던 은둔심리가 발동했다. 두문불출, 골동품 수집과 서예, 고대 문자 연구에 매달렸다. 남쪽에서 철도 가설을 놓고 문제가 발생했다. 짜이펑은 일찍부터 유학유술(有學有術), 학문과 술수에 능하다는 소리를 듣던 돤팡을 다시 불러냈다. 특명대신 자격으로 한동안 남쪽에 머물던 돤팡은 귀경길에 위안스카이의 칩거지 펑더(彭德)를 들렀다.

섭정왕 취임 1년 전의 짜이펑. 오른쪽이 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살 때 모습. 안겨 있는 어린애는 차남 푸제. 1907년 가을, 순친왕 왕부.
위안스카이는 돤팡을 극진히 대접했다. 프랑스 영화까지 한편 돌렸다. 돤팡은 사돈을 맺자고 간청했다. “허락해 주시면 절세의 국보 ‘毛公鼎(모공정)’을 딸에게 딸려 보내겠습니다.” 현재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서주(西周·기원전 11∼8세기)시대의 청동기 모공정은 돤팡의 소장품 중 하나였다. 위안스카이는 천하대사라면 몰라도 골동품이나 서화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평소 세상에 없는 보물을 갖다 놔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막료들을 물리치고 장시간 밀담을 나눴다. 담화 내용은 영원한 비밀로 묻혀 버렸다.

위안스카이의 거처에는 방문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는 청나라 황실이 위안스카이의 동향 파악을 위해 보낸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꼭 만나야 할 경우는 환자 행세를 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위안스카이는 당대 최고의 연기자였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동방잡지(東方雜誌)에 위안스카이의 사진이 실렸다. 늦가을 해질 무렵, 도롱이 입고 낚싯대 드리운 모습은 세상사를 멀리한 강태공을 연상케 했다. 고향의 아름다운 산수에 파묻혀 고독한 영혼을 달래는 모습은 짜이펑을 안심시키기에 족했다. ‘파사수조도’(坡蓑垂釣圖), 누가 달았는지 제목도 멋있었다. 잡지사 미술담당 기자가 매수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11년 신해년(辛亥年), 새해가 밝았다. 위안스카이는 용하다는 맹인 점쟁이를 불렀다. “중추절이 지나면 관성(官星)이 제 발로 다가옵니다.”

음력 8월 19일(양력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서 혁명의 총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다음날이 위안스카이의 생일이었다. 측근들과 술자리를 즐기던 위안스카이에게 조선 부인 한 명이 전보를 들고 달려왔다. 북양군이 보내온 전문을 읽은 위안스카이는 안색이 변했다. “변란이 났다. 홍양의 난(1850년 홍수전과 양수청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등한시할 수 없다.”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청 황실은 돤팡에게 진압을 지시했다. 돤팡은 미적거렸다. 3년 전 위안스카이의 목숨을 구해준 내각총리대신 경친왕(慶親王)과 협리대신(協理大臣) 나퉁(那桐·나동: 한때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칭화대학 경내에 있는 淸華園 세 글자가 대표작이다)이 위안스카이의 기용을 주장했다. “남방의 신군이 일으킨 반란이다. 현재 전국의 병력은 13만1800명에 불과하다. 그중 7만5000명 정도가 위안스카이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다하는 북양군이다. 진압할 사람은 위안스카이밖에 없다. 위안스카이를 내세우지 않으면 대청제국은 망한다. 기용하더라도 망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잘하면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섭정왕 짜이펑은 질색을 했다. 융유태후(隆裕太后)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친왕의 사자(使者)편에 호광총독(湖廣總督) 임명장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철부지들 어쩔 수 없다” 며 웃음보부터 터뜨렸다. 이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리가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듭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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