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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갈등, 2009년 공존, 2012 충돌 … 친박·친노 '적대적 공생' 10년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될 사람)’ 파문이 최근 정국을 흔들었다. 민주당 홍익표 전 원내대변인의 발언 파문이 가라앉기 무섭게 같은 당 이해찬 상임고문은 선거무효 세력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해 대선 불복 논란을 확산시켰다.



귀태 파문으로 본 친박·친노 경쟁의 역사
대선 패배 후 비주류 밀려났던 친노
국정원 댓글, NLL 정국서 전면 부상

 이 과정에서 나오는 얘기가 ‘친노(親盧·친노무현계)의 부활’이다. 현재 민주당은 비노(非盧) 계열인 김한길 대표가 간판이다. 그러나 민주당에선 김 대표의 목소리보다 친노 그룹의 볼륨이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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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태 발언’의 진원지인 홍익표 전 원내대변인이나 이 고문 모두 친노로 분류되는 인사들이고, 최근 대여 공세의 전면에 선 인사들도 친노계다.



 국가정보원 정치 개입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의 민주당 주력인 박범계 의원, 최근 새누리당이 끈질기게 특위 위원에서 ‘제척’(사건 당사자를 재판 등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해야 한다고 요구해 사퇴한 김현·진선미 의원,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위원인 전해철·박남춘 의원 등이 그렇다. 국정원 국조특위 민주당 주력인 박범계 의원은 열람위원도 겸하고 있다. 최근엔 친노 그룹과 가까운 정세균 민주당 상임고문이 나서 “(국정조사가 흐지부지되면) 장외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뒤 친노 그룹은 2선으로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친노 그룹이 국정원 국정조사, 북방한계선(NLL) 정국에서 강경한 목소리를 내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친노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쪽은 새누리당의 ‘친박(親朴·친박근혜계)’이었다. 청와대에선 박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안다는 이정현 홍보수석이 연일 실명으로 등장했다.



 그는 민주당에서 대선불복론이 나올 때마다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언동은 국민에 대한 도전”이라거나 “불복이면 불복이라고 입장을 밝히라”고 압박했다. 새누리당에선 ‘어당팔(어수룩해 보여도 당수가 팔단) 친박’ 황우여 대표와 ‘원조 친박’ 최경환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을 엄호하며 역공을 주도했다.



 2013년 하한기 정국이 친박과 친노의 대결로 뜨겁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 세력이 충돌한 것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김 시대’의 상도동·동교동계 세력을 대체해 이제는 여야의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입지를 굳힌 두 세력이 맞부딪친 지는 거의 10년째다.



 하지만 두 세력의 갈등 속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서로 마주 앉지도 않을 것 같이 냉랭한 두 진영이지만 서로의 존재가 곧 정치적 토대가 되는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다.



 두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2004년 4월 총선 전후다. 당시 탄핵 역풍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과반(152석) 의석을 차지하며 의회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 당시는 가히 친노의 융성기였다. 당시만 해도 열린우리당 자체가 친노 세력이었다. 비노 그룹은 모두 민주당(새천년민주당)에 남았기 때문이다. 탄핵 역풍이 워낙 거세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 달라”고 호소해서야 겨우 당을 추스를 수 있을 정도였다. 한나라당이 121석을 건진 것만 해도 선전으로 평가받았다. 이 121명 중에 현재의 친박 세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친노-친박의 첫 격돌은 그해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과거사법·언론개혁법·사립학교법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밀어붙이면서 시작됐다.



 나중에 비노로 돌아서긴 했지만 원조 친노로 불리던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자 야당 대표이던 박 대통령은 당시 장외투쟁을 불사하며 법안 처리 저지에 나선다. 박 대통령은 이 과정을 통해 ‘야당 지도자’ 이미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곧 두 세력 모두 3년 뒤인 2007년 악몽을 꾸어야 했다. 친박은 그해 8월 당내 경선에서 친이(親李·친이명박)계에 패해 ‘당내 야당’으로 전락했다. 대세를 형성했던 박 대통령이지만 이명박 후보를 앞세운 친이계에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친노 그룹은 아예 대선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쪼개지고 다시 붙여지는 과정을 거쳐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전신)으로 바뀌었고, 12월 대선에선 500만 표 차이로 참패해 정권을 내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이때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고 불렀다.



 두 세력은 그 후 2년 가까이 와신상담(臥薪嘗膽·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의 기간을 보냈다. 그러다 2009년 세종시 수정안 처리를 놓고 사실상 손을 잡았다. 친노는 세종시 건설이 노 전 대통령의 뜻이자 수정안이 정권의 오만함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친박은 ‘박근혜의 약속’을 명분으로 2010년 6월 친이계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친이계를 함께 견제한 오월동주(吳越同舟·어려운 상황에서 원수라도 협력함)의 양상이었다.



 비슷한 시기 친노 그룹은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강원지사, 김두관 경남지사를 배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친이에 쏠려 있던 정국 주도권은 친박·친노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두 세력의 정면 세 대결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이었다. 친노는 총선을 앞둔 2월 한명숙 전 총리를 새 대표로 뽑아 당내 대세를 장악했다. 친박도 박 대통령이 직접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친노에 맞섰다. 1차 대전에선 박 대통령이 진두지휘한 친박의 승리였다. 그러나 친노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도 127석을 얻어 만만찮은 저력을 보였다.



 곧 그해 두 번째 진검승부가 펼쳐졌다. 대선이 ‘박근혜 대 문재인’의 구도로 펼쳐지면서다. ‘친박 대 친노’ 본산의 대결이었다.



 양측은 격하게 대립했다. “이명박근혜 쌍둥이 정권”(문재인), “위기를 부를 실패한 정권”(박근혜)이라는 구호가 거칠게 부딪쳤다.



 게임은 박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곤 두 세력이 다시 맞붙을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요즘 들어 마치 연장전을 치르고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3김 시대 이후의 숙명일지 모른다.



 박명호(정치학) 동국대 교수는 “친박과 친노는 지난 10년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세력이 커졌다, 줄었다를 반복해왔다”며 “대통령을 만들어낸 경험을 지닌 두 세력은 어느 집단보다 강한 응집력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최근 친박은 친노의 거센 공세로 국정운영의 초점이 흐트러지는 애로를 겪고 있고, 친노는 (NLL 대화록 등을 통한) 친박의 역공으로 수세에 몰려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친박이나 친노나 자기 세력을 다시 응집시켜 나가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용호·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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