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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연애, 결혼, 섹스 … 그게 뭐 목숨 걸 일이라고!

그리스 신화의 요정 다프네(왼쪽)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프네는 혹시 무성애자였을까. 성적 매혹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asexuality)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알바니의 ‘아폴론과 다프네’(1615~1620) 추정. [중앙포토]


무성애를 말하다

동성애·양성애도 아닌 무성애
"전체 인구의 1% 넘어" 주장
뉴튼·에밀리 브론테·셜록 홈즈 등
역사·문학 속의 다양한 인물 들어

앤서니 보개트 지음

임옥희 옮김, 레디셋고

300쪽, 1만6500원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무성애자는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아폴론은 신들 중에서도 최고의 미모와 재능을 뽐내는, 말 그대로 신들 중에서도 ‘수퍼갑’으로 군림하는 신이었다. 그런 아폴론이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팽개치고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를 뒤쫓지만, 다프네는 한사코 도망친다.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가 ‘문제’라면 차라리 추악한 외모일지언정 ‘나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선택했던 다프네. 그는 관능적인 여인의 몸을 버리고 월계수로 화하여 자신이 원하던 눈부신 자유를 얻었다.



 아폴론의 손아귀에 붙들리기 직전, 월계수로 변신해 ‘사랑의 마수’로부터 벗어나는 다프네를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사랑할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 사랑하지 않을 권리도 소중하다고. 이 책은 온통 애정만능주의를 주장하는 세상 속에서, 당당히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리장전으로 다가온다.



 캐나다 브록대 심리학과 앤서니 보게트 교수는 전체 인구의 대략 7~8%가 동성애자라면 무성애자의 비율도 1%이상이라고 주장한다. 무성애는 단지 성관계를 혐오하거나 무관심한 경우뿐 아니라 성욕은 느끼지만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 경우, 감정적으로는 끌리지만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성욕도 느끼고 상대에게 끌리기도 하지만 신체적인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무성애자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사랑의 아픔을 다룬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룬 모든 음악, 미술에도 무관심한 것일까. 앤서니 보게트는 무성애라고 해서 반드시 로맨스가 결여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로맨틱한 감정과 성욕은 별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 없는 섹스’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섹스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섹스리스 커플’의 증가를 현대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팽배하다.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이 마치 ‘능력’의 일종인 것처럼 간주되는 분위기도 있다. 성적인 매력과 로맨틱한 감정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로맨틱 러브의 신화에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인물들 중에서 특히 과학자 아이작 뉴튼,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도 무성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문학작품 속의 대표적인 무성애자는 셜록 홈즈다. 홈즈의 완벽한 추리력은 육체적인 욕망을 완전히 거세하고 오직 ‘추리 그 자체’를 향해 달려가는 순정한 집중에서 우러나온다.



 최근 미국 드라마 ‘빅뱅’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모은 천재물리학자 셸든도 ‘사랑’을 ‘전혀 효율성이 없는, 심리적·육체적 에너지의 낭비’로 바라보는 유쾌한 무성애자였다.



 무성애는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무성애가 ‘정상은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무성애는 질병이나 성격 이상이 아니다. 사실 무성애보다 천만 배 위험한 것은 억지로 상대의 사랑을 요구하는 스토킹이나 데이트폭력 같은 것들이다. 다프네의 입장에서는 아폴론의 애정이 스토킹이자 데이트폭력이었던 것이다.



 무성애보다 훨씬 가슴 아픈 일은 분명히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사랑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나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어!’라는 식의 원한 서린 결단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도, ‘무성애적 시간’을 경험한다. 이성애 성향이 강한 보통 사람들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을 거친다.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창조적인 일에 집중할 때는 무성애적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직자는 물론 스포츠 선수들도 중요한 훈련 기간 동안에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한다. 열정의 대상을 향한 진정한 집중은 다른 곳으로 리비도를 빼앗길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성적 소수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의 다양한 고민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지내는 ‘섹스리스 커플’도 있고, 로맨틱한 감정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연인들도 있다. 마치 연애와 결혼과 섹스가 완벽한 삼위일체가 돼야만 진정한 사랑에 성공한다는 식의 선입견이 이성애자 안에서도 수많은 차별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 책을 읽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정상적인 사랑’ ‘대단한 사랑’ ‘멋진 사랑’에 대한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거꾸로 깨달았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미술작품을 감상했지만, 사랑에 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마다 매번 머릿속이 텅 빈 백지장처럼 느껴진다. ‘위대한 사랑’에 대한 지나친 강박이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피곤하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올바른 사랑은 없다. 지나친 사랑이 없듯이. 정상적인 사랑은 없다. 다만 당신과 내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나만의 사랑법’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이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뜻밖의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써오고 있다. 『씨네필 다이어리』 『마음의 서재』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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