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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럭 하나라도 틀리지 않게 깊은 속내까지 화폭에 담다

1 심환지초상 세부, 작자미상, 19세기 초, 보물 제1480호, 경기도 박물관 소장
문제적 인물들의 문제적 초상화들이다. 정형화된 조선시대 초상화 형식의 표피를 뚫고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가 펼쳐진다. 2)번 옅은 분홍색 관복 차림의 초상화는 채제공(1720~1790)의 것이고 3)번 오사모에 단령 차림의 초상화는 심환지(1730~1802)의 것이다. 두 사람은 정조 때의 유명한 재상이자 ‘극렬한 정적’들이었다. 2009년 발간된 조선미의 『한국의 초상화』(돌베개)에서는 이 두 초상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 <44> 조선미의『한국의 초상화』

채제공은 남인 출신의 명재상으로 정조의 탕평책과 문예부흥정책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 반면 심환지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등극까지 반대했던 노론 벽파의 영수다.

채제공은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초상화도 그것을 말한다. 초상화에 직접 쓴 자찬문에 “부채도 향낭도 임금님 은혜”라고 썼다. 하사받은 선물, 부채와 향낭을 기념하기 위해 사대부 초상화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공수자세 대신 두 손을 드러내고 있다.

채제공이 죽고 나서 정조는 그를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사관은 채제공이 “권모술수에 능했으며, 외모는 거칠어 보이지만 속마음은 실상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으며, 임금 뒤에서 “임금의 총애를 빙자하여 은밀히 자기의 사적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고 쓰고 있다. 채제공은 정조의 정책을 잘 이해한 현명한 재상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을 이용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한 부패한 관료였을까?

화가는 얼굴의 천연두 자국까지 정밀하게 그렸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세모진 사팔눈은 이 인물의 복잡한 양면성을 느끼게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대 최고의 초상 화가인 이명기(1756~1813)다. 이명기는 베이징(北京)에 다녀오면서 서양화법을 직접 체득해 초상화 작법에 적용했다.

2 채제공 초상(시복본), 이명기 필, 1792년, 보물 제1477호,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3 심환지 초상
두 번째 그림. 오사모에 단령 차림의 심환지는 사대부 초사화의 가장 전형적인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순조 실록』은 심환지가 “본래 아둔하고 재능이 없어 공적이 보잘것없었고 오직 당동벌이로서 일을 삼았으며 정조 사후 무자비한 정치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결국 1806년 관직이 추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실록 마지막 부분에 “권세가 높았는데도 자못 검소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그는 진정 사사로운 이익보다 국익을 추구한 인물이었을까? 개혁군주에 사사건건 반대한 보수적인 인물이었을까?

얼마 전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297통의 비밀 어찰이 세상에 공개됐다. 편지에서 정조는 때로는 심환지를 ‘생각 없는 늙은이’라고 공박하기도 하지만, 심환지 부인이 지병으로 고생하자 편지와 함께 삼뿌리를 보내는 자애로움도 보여준다. 채제공이 먼저 세상을 뜨자 정조는 정적이었던 심환지에게 반드시 문상을 가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공식적인 실록의 기록만으로는 심환지는 정조의 반대자였지만, 비밀 어찰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쓴 『정조의 비밀 어찰』(푸른역사, 2011)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심환지의 초상화를 그린 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저자 조선미는 이 초상화에는 “노론계의 거두로서 붕당정치와 세도정치를 잇는 역사적 격동기에 살았던 노학자이자 정치가의 내면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정교한 준찰법과 운염법이 발달하여, 거듭된 붓처리를 통해 복잡한 내면세계가 하나하나 화면 위로 끌어올려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둥글게 움푹 들어가 꺼진 눈매’와 지그시 바라보는 노회한 눈빛은 문제적 인물 심환지를 그대로 대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초상화들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의 10세의 초상화’(1650)처럼 쉽게 파악되지 않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상들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 작품들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유교적 예치 국가였던 조선은 풍성한 초상화의 시대였다. 조상 추모와 숭현사상은 사당묘우에 안치할 초상화의 수요를 만들어냈다. 또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것은 통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에게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린 공신상, 학덕과 인품이 뛰어난 사대부초상, 존경스러운 원로들을 그린 기로도상 등 다양한 유형의 초상화들이 그려졌다. 이외에도 유명한 승려들의 진영과 여인 초상화들이 몇 점 있다. 책은 한국적 초상화에 대한 개론과 더불어 70여 점이 넘는 개별 작품들에 대한 충실한 해제를 담고 있다. 수많은 실천 속에서 중요한 원리가 발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과 “터럭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는 핍진성의 원리가 그것이다.

전신사조는 “형상을 통하여 정신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받을 만한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초상화의 주요한 과제다. 그런데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본받을 만한 선비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존재했다. 초상화 인물들이 모두 비슷비슷하게 “담담하고 절제된 군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다. 인물들의 정신을 전하려는 전신사조의 원리는 핍진성의 원리를 만나면서 인물들의 더 깊은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초상화는 얼굴에 난 흉터로 병력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졌다. 인물을 이상화시키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실제 인물에 근접하기 위한 사실적 노력”에 충실했다. 저자는 “한국 초상화의 묘는 바로 이런 재현의 극으로부터 오는 표현력”에 있다고 강조한다. 정해진 틀 속에서 인물들의 개성적인 풍모가 담길 수 있는 근거이며 우리가 앞서 보았던 인물의 모순적인 내면을 끌어올린 명작을 만드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채제공과 심환지의 초상화를 오래오래 들여다 본다.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진정한 충신들이었을까? 권력의 정점에 올라 붕당정치를 이끈 주범들이었을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한 인물에 대한 예술가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주어진 중세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인물에 대한 솔직하고 대범한 묘사를 이루어낸 예술성이 나를 깊이 감동시킨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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