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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없이 묻힌 4만 명 … 비목은 울고 있다

강원도 백암산 1158m 정상에 세워져 있는 비목. 이 지역을 관리하는 7사단 예하 부대가 지난해 기존에 설치돼 있던 비목 시비(詩碑) 옆에 가묘를 만들고 나무 십자가 위에 인근에서 발견된 녹슨 철모를 걸어놓았다. [김성룡 기자]
‘초연(포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碑木)’.



[정전 60년] 1953~2013
6·25 최후의 격전지 화천
가곡 ‘비목’ 작사가 한명희
“유해 발굴해 혼 달래줘야”

 비목은 나무비석을 말한다. 6·25 때 강원도 화천 부근에서 숨져간 4만여 명의 국군과 중공군. 그들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앞에 놓인 나무비석이 바로 비목이다.



 30도를 웃도는 1일, 땡볕 더위 속 기자와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73·미시문화서원 좌장)씨, 6·25 때 월남한 이동표(81) 화백이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최전방 부대를 찾았다. 비목의 고향을 찾은 자리에서 한씨는 가곡 비목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를 상세히 들려줬다.



 “내가 TBC(JTBC의 전신 동양방송) 출신이야.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로 옮기기 전 TBC에서 라디오 PD를 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노래 대신 가곡 편성을 건의했지. 시험 삼아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10분부터 가곡 프로그램을 내보냈는데 프로가 히트를 쳤어. 매일 방송하는 걸로 편성이 바뀌었지. 그러다 작곡가 고 장일남(TBC 악단) 선생과 ‘지나간 노래만 틀지 말고 새로운 가곡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어요. 1968년 말 어느 날 통금에 걸려 집에 가지 못하고 당시 중앙일보 5층 숙직실에 앉아 지은 노래가 ‘비목’이야. (60년대의) 군생활을 회상하면서.“



 한씨는 60년대 중반 비무장지대 전투초소에서 소대장 생활을 했다. 한씨가 근무했던 부대 주변에선 중공군의 최후 공세로 불렸던 금성전투(13~19일)와 4·25고지 전투(20~27일)가 벌어졌었다. 사활을 건 혈투를 벌여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우리 군은 1만4373명의 피해를 보았다. 이 중 전사자는 2689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3만8700여 명 사망)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오솔길 같은 순찰로 곳곳에 유골과 유해가 즐비했지. 신병들은 무서움에 고생을 많이 했어. 순찰로에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돌무지가 여러 군데 있었고 나무십자가 모양의 썩어가는 나무들이 보였어. 당시 전투가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죽은 전우의 시체를 수습하지 못하고 주변의 돌로 쌓아놓고 나무비석을 세웠던 거지.”



 그때의 나무비석이 결국 가곡 비목이 됐다. 그러면서 한씨는 “순찰 도중 수습한 해골 두 개를 사무실에 가져다 놓고 전쟁에서 산화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며 “그만큼 참혹했던 전투였던 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한씨는 “작사가도 아닌 내가 노랫말을 쓴 게 창피해서 처음에는 한일무라는 가명으로 방송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작사한 것이 알려져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기자와 한씨가 찾은 최전방 부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 시절 사단장을 지냈던 7사단 예하 부대다. 이승준(44) 중령은 “당시 화천 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해 아군 측과 공산군 측이 끝까지 사투를 벌였다.  



‘비목’ 작사가 한명희씨가 비목 앞에서 이승준 중령과 얘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공방전 끝에 우리 측이 이 일대를 지켜내 화천댐과 발전소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르막 산악 도로와 녹음을 헤쳐나가길 7.1㎞. 흰 돌이 많은 백암산 자락에 위치한 해발 908m 백암소초(소대)에서 다시 1시간30분여 동안 쉬었다 오르기를 반복하며 1158m 정상에 올랐다. 부대 차원에서 ‘비목공원’으로 명명한 가로·세로 각 3m가량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난해 이 지역을 관리하는 부대가 새로 정비했다고 한다. 기존에 설치돼 있던 비목 시비 옆에 돌로 가묘(假墓)를 만들고 인근에서 발견된 철모를 나무십자가 위에 걸고, 녹슨 M-1 소총을 돌무지 위에 올려놨다. 비목엔 주황색 리본에 유성펜으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고혼이 된 전우들의 명복을 눈물로 빕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우들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부대 관계자는 “6·25전투에 참전했던 분이 얼마 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달아놓고 가셨다”고 전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오지 중 오지인 이곳은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서명되던 그 순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6·25 전쟁의 가장 참혹했던 마지막 격전지로 기록된 곳이다.



 이 일대에서는 지금도 유해가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부대 관계자는 “올해에만 44구의 유해와 1800여 점의 유품이 발굴됐다”며 “땅만 파면 유해가 나오는 곳”이라고 전했다.



 한씨는 “60년대 중반에는 유해를 발굴한다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정전 60주년을 맞아 이곳에 와 보니 전쟁에서 산화한 죽음의 의미와 살아 있는 자의 시대적 소임을 되새기게 된다”며 “북한이나 중국·유엔사와 협의해 대대적인 발굴을 통해 죽은 영혼을 달랬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남은 생을 6·25문화재단을 만들어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후세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전 60년,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비목의 상흔은 아물지 않고 있었다.



화천=정용수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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