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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죄의식 없는 나라, 하지만 …

김형석 목사는 “북한이 단번에 바뀔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했다. [김성룡 기자]
개신교 김형석(58) 목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돕기에 앞장서 왔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한민족복지재단 등 민간단체들의 대북 지원 사업에 관여하며 그동안 북한에 다녀온 횟수가 100번이 넘는다. 그가 인솔 책임을 맡았던 남한의 기독교방북단이 2002년 평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바람에 북한 당국으로부터 ‘공화국 창건 이후 최대의 반동’ 사건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기적을 이루는 … 』 김형석 목사 95년부터 북한 돕기 앞장

 김 목사가 그간의 북한 돕기 활동을 돌아본 회고록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중앙북스)을 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7년 무렵까지 현장에서 경험한 대북사업의 실상을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지난달 30일 만난 김 목사는 “책 내용 중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할 만한 사건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가령 1995년 대홍수로 북한에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치료약을 보낸 과정이 그렇다. 수십 만 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김 목사는 홍정길·옥한흠(2010년 작고)·하용조(2011년 작고) 등 명망 있는 세 목사로부터 2만 달러씩 모두 8만 달러의 약품값을 급하게 마련했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의 지원은 받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결국 의약품은 누가 누구에게 뭘 보낸다는 공식 화물 서류 없이 북한 남포항에 도착했다. 홍콩 화물선을 통해서였다. 김 목사는 “당시 의약품이 제대로 전달된 사실도 5년 뒤 방북했을 때에야 비로소 확인했다”고 말했다. 비공식 루트로 물품을 지원하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다.



 김 목사는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령이 함께하심을 체험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의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그래서 2007년 쉰둘의 나이에 늦깎이 목사가 됐다. 2009년 서울 봉천동에 그레이스교회를 개척했다. 교인 40∼50명의 작은 교회다.



 그는 “겪어 보니 북한은 오늘 약속을 내일 번복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하루아침에 바뀔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인도적 차원의 민간 지원은 과감하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현 정부의 대북 신뢰 프로세스도 좋습니다. 그런데 남북관계는 정치사회적 시각으로만 판단해선 곤란해요. 하나님이 남북한 주민을 위해 어떤 역사를 원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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