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뺑소니 잡는 블랙박스, 배우자 불륜도 잡는다

블랙박스는 차량 안의 대화를 녹음하고 앞 유리 쪽 영상을 찍는다. 때문에 교통사고 현장을 담는 것이 주된 용도지만 불륜 등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커플이 지나가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혼 10년차인 정진호(38·가명)씨. 올해 초 아내가 타고 다니는 차 수리를 위해 자동차 정비업소를 찾았다. 모처럼 생긴 주말의 여유를 아내를 위해 쓴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맘도 들었다. 수리를 하던 정비업소 직원이 말을 건넸다. “블랙박스 영상은 주기적으로 체크하시죠? 요즘 주차돼 있는 차량 보닛을 괜히 긁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다들 수시로 체크하시거든요.”

도로 위의 CCTV, 블랙박스 150만 대 시대
차 안 대화, 주행·주차 영상 모두 녹음
이혼 소송 때 '외도 증거' 채택 늘어
화면 수시 확인 '블랙박스 의부·의처증'
데이터 복구해주는 전문업체도 등장



블랙박스를 설치해 뒀지만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정씨는 블랙박스를 열어보자고 했다. 직원으로부터 블랙박스 내 메모리카드를 건네받아 정비소 사무실 컴퓨터로 갔다. 재생을 클릭한 정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낯선 남성과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아내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모니터엔 이 남성과 모텔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선명했다. 초등학생 딸 둘을 둔 정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블랙박스 영상을 들고 서초동 이혼전문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블랙박스에 남겨진 일탈의 흔적



블랙박스 보급 후 보험사기 적발이 쉬워졌다. 피해 차량 블랙박스에 녹화된 고의 충돌 장면.
 차량용 주행영상기록기, 일명 블랙박스가 도로 위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흥신소나 사설 탐정 등이 배우자의 불륜을 잡아냈지만 최근에는 블랙박스 등 첨단 정보기술(IT) 장치에 배우자의 부정이 포착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블랙박스가 배우자 외도의 ‘핵심 증인’으로 등장한 셈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이혼 법정에선 블랙박스를 핵심 증거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와 화제가 됐다. 1997년 결혼한 A씨 사례다. A씨는 결혼 생활 14년이 지난 2011년 1월 배우자 B씨의 귀가가 늦고 외박이 잦아지자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B씨의 승용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했고 B씨와 내연 관계인 C씨가 먼 곳으로 다니며 불륜 관계를 맺은 사실을 잡아냈다. A씨는 B씨를 추궁했고 결국 C씨와의 불륜 사실을 털어놨다. 부부는 그해 6월 이혼했고, C씨는 간통죄로 지난해 5월 부산지법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A씨는 1500만원의 혼인 파탄 위자료를 C씨로부터 받아냈다.



 이렇게 블랙박스가 ‘외도 탐정’ 및 ‘이혼 법정의 강력한 증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풍속도도 생겨나고 있다. 배우자의 블랙박스를 수시로 몰래 확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은 설치하자고 하는데 배우자는 ‘의심받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블랙박스 설치 문제로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아낸 경우도 있다.



직장인 김동섭(35·가명)씨 얘기다. 김씨는 주부인 아내가 지난 3월 차를 몰고 외출하다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자 걱정하는 마음에 ‘블랙박스를 설치해 주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아내가 극구 거부하는 모습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 김씨는 마침내 아내의 통화 내역에서 다른 남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1년 전부터 아내가 외도한 사실을 알게 됐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블랙박스는 불륜 현장에서 ‘매의 눈’ 역할을 한다. 같은 직장 동료 사이인 D씨와 E씨.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각자에게 배우자가 있었던 두 사람은 눈을 피해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밀회를 나누곤 했다. ‘마음은 바쁜데’ 멀리 가기엔 시간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지 않는 시간대를 이용했지만 1년여 지속된 ‘밀애’는 블랙박스로 인해 끝이 났다. 업무 시간 도중 애정 행각을 나누는 장면이 반대편에 주차돼 있던 동료 직원의 블랙박스에 모두 찍히고 말았다. 우연히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한 동료 직원은 해당 영상을 회사 윤리위원회에 제보했고, 두 사람은 동시에 해고됐다.



 이혼 법정은 이 ‘매의 눈’ 블랙박스를 대부분 판결의 핵심 증거로 인정한다. 이인철 이혼전문변호사(법무법인 윈)는 “‘불륜 장면을 녹화한 블랙박스를 증거로 쓸 수 있느냐’고 문의하는 분이 많다”며 “호텔을 들어가는 모습 등이 확실하게 나오기 때문에 많이 인정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블랙박스에 녹화됐다고 해서 모두 증거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이 변호사는 “이혼 물증을 잡기 위해 불법으로 증거를 확보한 경우엔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처벌이나 손해배상 청구를 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랙박스는 시동이 켜짐과 동시에 차량 안에서 대화하는 내용과 차 앞 유리 쪽 영상이 모두 찍힌다. 주행 중뿐 아니라 주차 중일 때의 영상도 녹화되고, 차 밖으로 나가는 모습 등도 저장된다. 한국 가정문제상담소 전인중 소장은 “블랙박스의 이런 ‘능력’을 알고도 배우자가 모를 것이라는 착각, 본인 스스로 설치해 놓고도 모든 과정이 녹음·녹화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전 소장은 “배우자의 불륜 영상을 확인한 뒤 참다가 트라우마에 시달려 상담소를 찾는 분이 꽤 있다. 이혼으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다”고 했다.



 최근 인터넷 이혼상담 사이트에는 ‘블랙박스 의처·의부증’ 단어가 꽤 올라온다. ‘배우자가 자신을 의심해 수시로 블랙박스를 확인하며 압박을 하는 탓에 부부 생활을 더 이상 이어 가기 어렵다. 이 ‘블랙박스 의심증’이 이혼 사유가 되는 것 아니냐’는 고민들이다. 이곳에 올라온 사례 가운데는 상대방이 오해할 여지를 아예 남기지 않으려 영상을 수시로 삭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의처·의부증이 심각한 경우 남편이나 아내 몰래 전문 업체에 맡겨 영상이나 음성 데이터를 복원하기도 한다. 서울 지역의 한 블랙박스 복구 전문 업체 관계자는 “남편 몰래 차를 가져와 영상을 복구해 달라는 문의가 최근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교통사고 현장선 ‘충실한 목격자’ 역할



 이렇듯 불륜 탐지용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긴 했지만 블랙박스 본연의 역할은 뭐니 뭐니 해도 교통사고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이다. 사고 현장에선 목격자의 증언보다 휠씬 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지난 4월 발생한 강남대로 5중 충돌사건에서 블랙박스는 피해자 신분이었던 벤츠 운전자를 피의자 신분으로 뒤집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나를 무리하게 추월하려다 사고가 났다’며 이미 죽은 운전자들에게 혐의를 씌웠지만 담당 경찰의 집요한 수사와 현장 도로를 함께 달리던 다른 차량의 블랙박스 등의 증거를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사망자의 차를 빠른 속도로 뒤따르는 벤츠 차량이 생생하게 찍힌 것이다. 사건을 담당했던 강남경찰서 교통조사과 강경원 조사관은 “사고 이후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아 계속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블랙박스를 포함한 여러 증거를 확보해 유가족의 억울함을 덜어줬다”고 말했다.



 이처럼 교통사고에서 블랙박스의 역할이 커지자 포털사이트 카페에는 ‘블랙박스 동호회’ 등이 만들어져 교통사고 영상이나 목격담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기도 한다. 특히 ‘자해공갈단’ 등에게 당한 영상을 그대로 올리면서 주의를 당부하기도 한다. 갑자기 나타나 차에 부딪혀 ‘뺑소니’를 주장하는 황당한 상황에서 블랙박스가 ‘충실한 목격자’가 돼 주는 셈이다.



지난해 8월에는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타낸 40대 남성이 자신이 몰던 차에 장착된 블랙박스 때문에 덜미가 잡히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이 남성은 최근 3년간 전국을 돌며 19건의 교통사고를 낸 뒤 보험금을 청구해 3600여만원을 부당하게 타낸 전형적인 보험사기꾼이었다.



금융감독원의 허창언 보험담당 부원장보는 "블랙박스가 보험사기 적발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보험회사에서는 블랙박스를 설치한 차량에 한해 보험료 3%를 자동으로 할인해 준다. 또 교통사고 관련 소송에서도 블랙박스가 재판의 주요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증거물의 10~20%를 블랙박스가 차지하고 있다.



모든 차량 설치 의무화 추진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자동차회사가 출고하는 모든 차량에 차량용 블랙박스를 의무 장착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의원은 “블랙박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면 교통사고 시 책임 소재 판단을 용이하게 하고 교통사고 예방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물론 법안에는 자동차 내외의 특정 공간과 운행 기간 외 영상 기록을 하면 안 된다는 단서 조항도 추가해 사생활 부분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이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난해 국내 블랙박스 판매량은 150만 대. 2010년 50만 대에서 3배가량 증가했다. 50여 제조업체가 200개 넘는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 블랙박스 공급이 많아지면서 주차장이나 도로엔 운전자 없이 파란 불을 번쩍이며 작동하고 있는 블랙박스들을 볼 수 있다. 미니 CCTV 역할을 하는 셈이어서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쓰임새 많은 기기는 늘 지능형 범죄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보험사기에서 많이 등장한다. 블랙박스 카메라 반경 내에서 생생하게 사고 현장을 연출한 뒤 이를 역이용해 보험사기를 벌이는 방법 등이다. 또 최근 블랙박스 카페에 한 남성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상대방의 얼굴이 훤히 보이는 영상을 무차별적으로 공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차량에 녹화돼 있는 제3자의 애정 행위를 상대방 동의 없이 올려놓고, 거래를 시도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는 중범죄에 해당한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촬영된 영상을 모자이크도 없이 올리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블랙박스라는 일종의 ‘개인 CCTV’가 보편화하고 있는 만큼 명확한 기준을 세워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송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