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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교환 합의에만 1년 반 … 비극은 아직 진행 중





휴전 60주년 … NARA 사진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⑥ 휴전회담
중앙일보·국사편찬위원회 공동 기획













1951년 봄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지금의 휴전선 부근까지 전선을 밀어 올렸다. 이후 일진일퇴가 반복됐다. 양쪽은 어느 한 편의 일방적 승리가 불가능하고, 무력통일도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정전(停戰)회담이 열렸다. 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해 53년 7월 27일 체결될 때까지 2년간 본회담 159회, 부속회담 765회가 진행됐다. 정전회담은 전쟁 마무리를 위한 협상이었지만, 총이 아닌 말로 싸우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회담장 바깥에서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날마다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정전협상, 51년 7월 10일 시작



10월 중순, 공산군의 제안으로 회담장소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군사분계선 설정, 외국 군대 철수, 정전감시위원회 설치, 포로송환 방식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포로송환 문제였다. 11월 초까지 군사분계선을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시간을 보냈고, 그 다음엔 전쟁포로 송환 문제로 1년 6개월 이상을 끌었다.



 유엔군은 포로들의 선택권을 주장했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국가를 스스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북한군·중국군은 포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군사적 승리를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심리전과 이데올로기전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됐다. 예컨대 공산군 포로가 자유세계를 선택한다면,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효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념이 다른 포로들 사이에 폭력적 대립이 격화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수용소에선 포로끼리 폭력 대립도



 52년 말, 한국전쟁의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53년 3월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며 협상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53년 4월 재개된 정전회담에서는 부상포로들의 교환이 처음으로 성사됐다.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 처리에 합의함으로써 1년 반이나 끌어왔던 포로 교환 문제가 해결됐다.



 유엔군의 포로 가운데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한국이나 대만 등에 남기를 희망하는 이들을 반공포로라고 불렀다. 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군의 동의 없이 2만 7000여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반공포로들이 자유진영에 남지 못할 것을 우려한 결단이었지만, 전 세계가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에 경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협상을 반대했다. 그는 “나는 분단을 고착화하는 어떤 휴전에도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한국만이라도 싸워 북진통일을 이루겠다고 주장했다. 51년 중반기부터 전국에서는 휴전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정전회담이 중단됐다. 한국군이 정전회담을 준수하도록 유엔군이 보장하겠다고 함으로써 회담이 재개됐다. 53년 7월 27일,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국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3년 이상 계속된 전쟁이 끝났다.



반공포로 2만7000여 명 석방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민의 불안을 덜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정전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리라고 경고했다. 실제 반공포로 석방은 이와 무관치 않았다. 이 대통령의 압박에 미국은 정전협정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데 이어, 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또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경제의 복구를 위해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역사상 가장 긴 정전회담이었지만,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전’은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상태, 즉 군사적 충돌을 잠시 멈춘 것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고위정치회담을 3개월 내에 열도록 규정했다. 54년 4월 열린 제네바회의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 외국군 철수 등을 토의했지만,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정전체제 속의 분단이란 한반도 상황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배영대 기자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약칭. 미국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존·제공하는 독립기관이다. 한국 관련 사진 10만여 장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에 실리는 사진은 대부분 미육군통신대(Signal Corps) 사진부대(Photo Detachment)가 찍은 것이다.



◆사진설명



1
남한의 포로수용소 정경. (이하 인용문 안에 있는 설명은 모두 원본에 달려 있는 것이다) “유엔군 병사가 남한의 유엔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다. 1950년 6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공한 이래, 약 14만 명의 북한·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유엔군에 포로가 됐다. 이들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엄격하게 관리됐다. 1951년 3월.”



2 정전회담 북한·중국군 대표단. “유엔대표단과의 정전협상이 재개되었을 때, 개성에 모인 공산군 대표단. 왼쪽부터 중국군 세팡(謝方) 소장·덩화(鄧華) 중장, 인민군 남일 대장·이상조 소장·장평산 소장. 1951년7월 16일.?



3 정전회담 유엔 대표들. “개성으로 평화대표단을 운송할 헬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아레이 버크 해군 소장, 로렌스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터너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대장, 헨리 호즈 소장. 1951년 7월 24일.?



4 한국군 심야회의. “대한민국 관리들이 정전협상의 추이를 논의하는 심야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변영태 외무부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이기붕 국방부장관, 김정렬 공군참모총장, 백선엽 소장. 1951년 7월 27일.”



5 개성에서 처음 열린 정전협상. “개성 유엔군이 사용하던 건물. 유엔사령부 선임장교와 공산군 지휘자들 간에 정전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개성의 유엔 건물 근처에 유엔사령부 호송차량이 보인다. 1952년 9월 2일.?



6 6·25 3주기를 맞아 거리에 나온 여고생들. “남한 학생들이 한국전쟁 3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시내 거리에서 행진하고 있다. 이 시위는 며칠간 진행됐다. 1953년 6월 18일.”



7 “한국전쟁 3주년을 맞아 남한 주민들이 시위하는 장면의 항공사진. 서울 중앙청 건물 앞에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내용을 듣고 있다. 1953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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