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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칼은 있고 돈은 없어 … 경제는 활성화 욕망뿐"

2007년 10월 3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중앙포토]▷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군대, 칼은 쥐고 있지. 경제, 돈은 못 가지고 있어… 그저 그렇게 알면 되겠어요.”

 2007년 10월 3일 오전 9시34분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시작된 정상회담이 중반을 치닫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런 말을 꺼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경협 사업을 화제로 삼자 자신의 ‘칼은 있으나 돈은 없는’ 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난 경제는 그저 하자고 하는, 활성시키자는 욕망뿐이지”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회담에서 유독 군부를 자주 언급했다. 그는 해주 일대를 평화협력지대로 만들자는 노 전 대통령 구상에 대해 “해주는 내가 국방위원장으로 말합니다. 개미도 들어가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집중된 데인데 우선 군대가 반대할 테고. 무슨 내각에다가 경제행위꾼들에게 아마 ‘아직 개성에서 맛도 못 본 주제에 뭐 때문에 해주를 또 내라고, 아마 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북한 군부에 대해 “완고한 2급 보수랄까요”라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오전 131분, 오후 115분 등 모두 246분간의 정상회담 대화 내용을 담은 회의록엔 18년간 북한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던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이 드러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듯 회담의 문서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7·4공동성명(1972년)과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 내용 등을 거론하며 “크게 기대를 걸었는데 이런저런 정권교체와 정세변화로 빈 종이짝이 되고 말았다”면서 “새로운 선언은 난 개인 생각으로는 뭐 필요하겠는가. 그저 정부라고 하면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이 두 정권이 왔다갔다 한 것밖에 없는데 자꾸 문서화되고”라고 했다. ‘문민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 임기를 불과 넉 달 남겨뒀던 노 전 대통령을 은근히 자극하는 발언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표현을 썼다기보다는 고도의 심리전일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다.

 김정일은 김양건 통전부장과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 핵심 엘리트들에게 “계관 동무 오라 그러라우”라거나 “앉아서 얘기하라우”라는 식의 반말을 썼다. 최고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노 전 대통령 앞에서 과시하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남측 배석자인 김만복 국정원장에게까지 “오늘 합의된 것 그것 다 조항에 넣으시오”라고 지시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당시 추진되던 베이징 올림픽 한국 응원단의 북한 육로 통과 문제를 언급하며 ‘베이징행 북한 철로 이용의 의미’를 부각시키자 “의미는 무슨, 인기나 끌어서 뭐하게”라며 핀잔을 주는 듯한 장면도 나온다.

 “남쪽 사람들이 자주성이 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라며 “자꾸 비위 맞추고 다니는 데가 너무 많다고 난 생각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래놓고는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 너무 인격모독적인 것 같은데…”라며 병 주고 약 주고 식의 화술을 구사했다. 이런 언급들을 놓고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의도적인 결례를 범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투박한 수사(修辭)도 자주 등장했다. NLL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땐 “북방한계선은 뭐고 군사경계선은 뭐고, 침범했다 침범하지 않았다, 그저 물위에 무슨 흔적이 남습니까. 그저 생억지 앙탈질”이라고 하거나 “대동강에 배 지나간 자리,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도 흔적이 없는데”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제스처는 컸지만 이른바 ‘통 크게’ 선선히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평화협력지대 설치를 계속 요구하자 “우리나라가 중국땅이라든가 러시아 원동(극동의 북한식 표현)땅도 아니고 조그만 땅인데, 거기서 다 뜯어 공단들만 하면 우리가 이때까지 이룩한 민족자주경제는 다 파괴되고, 시장경제에 말려들어가고, 주체공학이 없어지고 하는 이런 정신적인 재난이 올 수 있다”면서 경계심을 보였다.

 현대와의 금강산 관광 사업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한마디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는 “남조선 당국적인 투자가 돼야지… 우리가 많이 쓴맛을 봤다”고 말했다. 현대와 합의한 사업이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숨지자 추진력이 떨어졌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 관리들에게 “앞으로 무슨 삼성이요, 현대요, 대우요 이렇게 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6·15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서울 답방’에 대해 그는 “미사일 문제요 핵 문제요, 지금 가자고 해도 전 세계가 놀라서 와락와락 할 때 내가 뭐하러 가겠어요”라며 “앞으로 가는 경우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 갈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 내세우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정상회담에 내세우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군사적 문제가 이야기될 때는 내가 갈 수도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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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