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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의 전쟁① 1962년 중·인전쟁] 대약진운동에 실패한 마오쩌둥, 쿠바 위기 틈타 진격 명령




중국은 국제 문제를 논할 때마다 언필칭 평화 5원칙을 내세운다. 1954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인도 자와할랄 네루 수상과 체결한 협정문에 담긴 ▶주권과 영토 보전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 공존 등을 지칭한다. 그렇다고 중국이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는 아니다.

중국은 1949년 건국 후 한국전쟁(1950), 중·인전쟁(1962), 중·소전쟁(1969), 중·월전쟁(1979) 등 크고 작은 전쟁을 여럿 치렀다. 1962년 용(중국)과 코끼리(인도)의 전쟁을 살펴봤다.

지난 4월 중순 중국 군 소대 병력 50여 명이 중국-인도-파키스탄이 맞닿은 카슈미르 지역 '실질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을 넘었다. 중국은 통제선 너머 19㎞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다. 4월 15일 중국 군을 발견한 인도-티베트국경경찰(The Indo-Tibetan Border Police)은 적 진지 300m 앞에 장벽을 세우고 대치했다. 인도는 중국 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중국 외교부는 '월선'을 부정했다. 대치는 5월 6일 마무리됐다. 20일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서두른 모양새다. 중국은 인도와 1700㎞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분쟁이 발생한 서부 지역은 악사이친(Aksai Chin)으로 한국 면적의 약 3분의 1 크기인 3만3000㎢의 규모다. 1962년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이 통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1962년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미·소 간 쿠바미사일 대치로 핵전쟁이 초읽기에 돌입했던 그해 10월 히말라야 산맥에서 전쟁이 터졌다. 4월부터 시작된 인도-중국의 국경 분쟁이 드디어 전쟁으로 폭발했다. 10월 22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보도는 이렇다.
"시짱(西藏), 신장(新疆) 변방부대의 연속 보고에 따르면 인도 침략군이 도발한 중·인 변경 동·서 양단의 무장 충돌은 오늘도 격렬하게 진행됐다. 중국 변방부대는 단호한 자위 반격을 통해 동단에서는 롱주 등 거점 7개 소를 수복했다. 서단에서도 인도 군의 침입 거점을 퇴치했다. 현재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파죽지세의 중국은 24일 ▶실질통제선의 존중 ▶통제선 20㎞ 후방 철수 ▶총리회담이라는 세 가지 정전 조건을 제안했다.

수세에 몰린 인도는 2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와 함께 네루 수상은 중국의 정전 조건을 거부했다. 중국 군은 개전 7일 만에 160㎞를 진격했다.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가 위협받았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인도에 낭보가 들어왔다. 때마침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적으로 마무리한 미국이 인도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중국은 11월 21일 자정 철수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일 실질통제선으로 다시 물러났다. 8일 중국은 앞서 제안한 3개 항목의 정전문서에 저우언라이의 서명을 담아 일방적으로 인도에 보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당시 G H 허드슨 영국 옥스퍼드대 극동문제연구소장은 중국이 대내적 요인 때문에 인도를 침입했다고 분석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내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반격의 위험이 내포되지 않는 전쟁은 도리어 이익이 된다는 패러독스를 한국전쟁을 통해 터득했다는 설명이다. 1962년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참담한 실패로 인민은 불만이 늘고 당 간부 사이에서는 리더십에 대한 회의가 동시에 싹트고 있었다. 마오는 한국과 대만을 검토했다. 그에겐 안전한 전쟁이 필요했다. 한국과 대만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과 싸우기에 중국은 힘이 부쳤다.

인도는 마오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켰다. 비동맹을 표방한 고립무원 인도는 어떠한 군사 동맹도 없었다. 핵 능력도 없었다. 병력도 중국보다 적었다. 게다가 파키스탄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은 본토와 전장을 격리시켰다. 제한된 범위에서 전쟁이 수행될 수 있었다. 반격의 위험도 없었다. 여기에 소국을 위협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인도는 크고 강했다. 중국이 중국 군의 '막대한 사상자 수'를 강조했던 이유다.

인도의 티베트 정책도 화를 자초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인도였지만 독립을 갈구하는 티베트 국민을 동정하지 않았다. 영국처럼 중국과 갈등을 피했다. 1950년 티베트는 주권국으로 국제적 승인을 호소했다. 영국과 인도는 이를 묵살했다. 티베트는 결국 중국으로 넘어갔고, 인도에 완충지대 티베트는 사라졌다.

허드슨 교수는 인도전쟁 발발의 또 다른 이유로 중국의 시기심을 들었다. 인도는 중국의 호적수다. 서방의 모든 경제 원조를 차단당한 채 소련으로부터의 쥐꼬리만 한 원조를 받던 중국의 눈에 소련과 서방으로부터 동시에 원조를 받고 있는 인도가 얄미웠다. 중국은 인도에 타격을 주고 싶었다. 중국은 전략의 고수다. 인도와 국지전에서 승리하면 분쟁지를 대거 차지할 수 있었다. 반면 인도는 중국과의 전쟁이 힘에 부쳤다. 파키스탄은 강력했고, 티베트 내 반중 세력은 약했다. 인도에 적은 많고 우군은 적었다. 인도는 운신의 폭이 좁았다. 독립 후 1962년까지 인도의 대중 정책은 자충수였다. 중국은 수 싸움에서 앞섰다.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신경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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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