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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인재근 의원이 본 말년의 김근태와 치유센터

정치인은 웃어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웃지 않는 남자’였다. 부인 인재근 민주당 의원의 말이다. “통 웃질 않는 거예요. 카메라 앞에서도. 정치인은 싫은 자리에서도 웃어야 하는데.” 그가 웃음을 잃은 건 대략 2006년부터였다. 온몸이 굳는 파킨슨병 때문이었다. 중추신경계의 교란으로 처음엔 목, 다음은 어깨, 그리고 얼굴이 굳었다.

 “그걸 병인지 모르고 웃지 않는다고 얼마나 성화를 부렸는지. 고문 당했던 건 까맣게 잊고 닦달만 했어요. 그게 가슴 아프고 미안해요.” 2011년, 결국 얼굴에 이어 심장도 굳었다.

 아내를 보통 ‘안사람’이라 하지만 그는 김근태의 ‘바깥사람’이라 불린다. 1970년대 이화여대 시절부터 학생운동·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김 전 고문의 평생 동지였다. 25일 김근태 치유센터 개소식을 앞둔 그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남편을 ‘김근태씨’ ‘이분’ 또는 그냥 ‘김근태’라고 불렀다.

남편, 20일간 당하면서 고문 딱지 감춰둬

 -남편이 고문당한 걸 처음 세상에 알렸는데.

 “1985년 9월 26일, 남편이 경찰에 끌려간 지 20일째 되던 날 검찰청 521호 검사 방 앞에서 반쪽이 된 김근태씨가 부축을 받고 오는 걸 봤어요.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어!’라고 소리쳤더니 고문당한 걸 말하곤 싶었는데 ‘얘기하면 인재근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걱정에 이 사람이 망설이더라고요. 내가 막 다그쳤더니 첫마디가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였어요. 발버둥치다 생긴 발뒤꿈치 상처를 보여줬어요. 전기고문할 때 발에 쇠침봉 같은 걸 연결했는데, 발등도 탔어요. 그러나 (고문)당하면서도 그냥 널브러진 게 아니에요. 발뒤꿈치 상처의 딱지를 몰래 두루마리 휴지로 싸놓고 ‘언제 인재근이 또 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김 전 고문은 딱지를 인 의원에게 전달하기 직전 교도소 직원에게 빼앗겼 다. 하지만 재심 때 한 교도관이 딱지를 빼앗았던 사실을 고백해 결국엔 고문의 증거로 채택됐다.

이근안 면회 후 “용서 안 돼, 그게 짐이다”

 -1980년대 ‘싸움대장’으로 불리었죠.

 “김근태씨는 ‘인재근한테 고문당한 걸 말했으니까, 인재근은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런 기대감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판사가 무슨 증거인멸을 할 우려가 있다면서 나를 면회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그날(9월 26일) 이후 첫 재판인 12월 18일까지 전혀 만나질 못했어요. 그때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요. ‘내가 정말 군사독재 끝나게 해주겠다, 치명적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래서 만든 게 ‘민가협’이에요. ‘싸움대장’이란 별명은 그때 생겼어요 .”

 실제 인 의원이 만든 민가협은 5공 정권에 큰 위협이었다. “엄마의 힘이란 대단해요. 민가협 엄마들은 절대 (아들이 있는) 구치소 앞을 안 떠나요. 그런데 난 부인이잖아. 키워야 할 새끼가 있으니 집엔 가. 뭐 남편은 국가가 잘 보호해주고 있으니(웃음). 그럼 엄마들은 ‘인재근이 간다’고 난리야.”

 -고문했던 이근안씨, 용서했나요.

 “작년에 정지영 감독이 찾아왔어요. 남편이 이근안을 용서했느냐고 묻는데 ‘용서 못했다’고 했어요. 2004년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남편이) 면회를 하고 왔는데 3일 정도 말을 안 해요. 진정 용서를 구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어서 더 참담함을 느꼈대요. 한 성직자한테 ‘용서하고 싶은데 마음속에선 용서가 안 된다. 그게 짐이다’라고 했어요. 그 성직자가 ‘당신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라고 했는데, 그게 위로가 됐어요. 그걸 정 감독에게 있는 그대로 말했더니 정 감독이 ‘이제 영화(‘남영동 1985’) 만들 수 있겠다’면서 갔어요. 이근안, 아직 반성 없다는 말을 전해 들어요. 그저 (그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할 수밖에. 그러나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

그는 하늘로 출장 갔지만 그 정신 이을 것

 -남편 대신 직접 정치할 생각은 없었나요.

 “원래 내가 직접 정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난 김근태가 국회의원에 머무르진 않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영부인 되는 걸로 모든 걸 다 양보하려고 했지. 하하. 내가 막 부추겼어요. ‘당신은 장관을 임명할 사람이야’라고. 그러면 이 진지한 사람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인재근’, 이렇게 말해요. ”

 -인 의원에게 김근태 센터는 어떤 의미입니까.

 “김근태는 갔지만 김근태 치유센터는 생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추진했죠. 남편은 하늘나라에 출장 갔지만 ‘김근태의 인재근’이 땅에 남아 사람의 치유를 위해 뛰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어요. 지난해 6월 ‘진실의 힘’이란 인권단체의 인권상 두 번째 수상자가 됐죠. 아, ‘진실의 힘’ 상패의 글이 너무 좋았어요. ”

 인 의원은 김 전 장관의 임종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 귀에 대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당신이 못하고 간 거 내가 다 하겠어. 당신과 살아 행복했어.’ 그랬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어요.” 인 의원은 ‘김근태 정신’을 실천한 뒤 남편과 합장(合葬)될 것이라고 했다. 김근태 정신은 민주주의와 인권, 즉 ‘인권정치’라고 했다. 인 의원이 인터뷰 도중 “글이 너무 좋다”며 보여준 ‘진실의 힘’ 상패엔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고 적혀 있었다.

강민석·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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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