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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60주년…NARA 사진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에는 총 261척의 함정이 동원됐다. 대한민국 해군 함정 15척도 포함됐다.

7만여 병력 상륙 … 이튿날 자정 인천 장악

 참여 병력 규모도 대단했다. 모두 7만여 명에 이르렀다. 맥아더 사령부 산하 제10군단의 지휘 아래 미 해병 제1사단과 보병 제7사단이 주축이 됐다. 공격 개시 1시간 30분만에 첫 상륙선이 해안에 닿았다. 이튿날 자정까지 연합군은 인천을 완전 장악하며 서울 진격 채비를 서둘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일거에 유엔군에 유리해졌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이래 80여 일이 지날 때였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 초기부터 구상됐다. 맥아더 사령부는 개전 후 2주일이 지난 7월 첫 주부터 한반도의 허리 부근에 상륙해 북한군을 포위 공격하는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몇몇 후보지들이 고려되었지만 맥아더는 애초부터 인천을 염두에 뒀다.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이었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는 9월초부터 미군, 한국군, 관료, 미대사관 사이에 상륙작전이 곧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번져나갔다. 당시 미군 CIC(8·15 광복 직후 남한에서 활동한 미군 24군단 소속 첩보부대)는 낙동강 전선 이남에 약 5000명의 첩자들이 남한 관련 정보를 수집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 북한에 “기습상륙 대비하라” 경고

 중국은 유엔군의 기습 상륙작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낙동강에 집결된 북한 병력을 빼내어 상륙이 예상되는 지점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낙동강 전선의 병력을 인천지역으로 이동시키지 못했다.

 상륙작전은 이틀 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인천과 서울을 잇는 32㎞의 경인국도를 거쳐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는 2주 가량 소요됐다.

북한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서울방어에 투입하며 저항했다. 미 해병대와 7사단은 각기 김포-행주-영등포 및 안양-수원 방면으로 협공하여 서울을 포위 공격했고, 결국 사흘간의 치열한 서울시가전을 치른 끝에 9월 27일 오후 3시 8분경에 중앙청을 점령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서울 잔여병력은 27일 밤을 기해 전면 철수했다. 빼앗긴 수도 서울을 석 달 만에 되찾은 것은 심리적으로도 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성과였다. 군산이나 주문진도 상륙지로 거론됐으나 인천이 최종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서울 탈환과 함께 유엔은 다시 한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퇴각하는 북한군을 어디까지 추격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느냐, 아니면 38선을 돌파해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느냐의 선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38선을 파괴하면서 남침한 이상 이제 38선이 존속할 이유가 없어졌다”며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주문했다. 그러나 38선 돌파는 중국과 소련의 직접 개입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유엔군의 외교경로를 통해 “38선이 위협받게 되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표명하고 나섰다. 유엔의 결정이 지연되는 가운데 10월 1일부터 전선은 점점 38선 이북으로 확대돼 나갔다.

마오쩌둥 “38선 위협받으면 중국 개입할 것”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개입하면서 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중국군의 숫자는 기껏해야 5~6만명 정도일 것이라고 맥아더는 예상했었는데 실제론 그런 추측을 훨씬 뛰어넘었다.

 10월 19일 신의주·삭주·만포진 세 곳을 통해 중국군 25만여 명이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해 51년 1월 4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다. 진퇴가 거듭되면서 전쟁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이후 서울을 재탈환한 것은 3월 14일이며, 3월 24일엔 38선을 다시 돌파하며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6·25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그 어떤 전쟁보다도 인적·물적 피해가 컸다. 전쟁은 한반도가 주변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심화되며 남한과 북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의 전초기지로 부상했다.

고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배영대 기자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약칭. 미국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존·제공하는 독립기관이다. 이번 시리즈에 실리는 해방 이후의 사진은 대부분 주한미군에 배속됐던 미육군통신대(Signal Corps) 사진부대(Photo Detachment)에서 찍은 것이다.

◆ 사진설명

1
전쟁 초반의 열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 NARA 사진 원본에는 “1950년 9월 15일. 미군 해병대원들이 인천의 블루비치(Blue Beach)에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다. 함정 261척과 7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2 평양 김일성 집무실. “1950년 10월 21일, 평양의 북한정부청사 내부 김일성 집무실. 왼쪽부터 버지니아 출신의 트루스콧 대위, 인디언헤드 특임부대의 지휘관 포스터 중령, 파든 대위가 평양에 대한 향후 전략을 짜고 있다.” 소련의 스탈린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3 어느 쪽이 아군이고 적군일까. 북한군?중국군?한국군(사진 왼쪽부터)의 생김새가 비슷하고 장비도 유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잘 식별하는 것이 필수였다고 한다. 사진 원본에는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한국군의 월동복장. 1951년 10월 17일”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4 오빠를 찾아 울부짖는 소녀. 사진에 이런 설명이 달려 있다. “1950년 11월 13일. 482구의 시신 속 에서도 자신의 오빠를 찾지 못한 문인덕양이 울부짖고 있다. 함흥. 공산군에게 구타당한 뒤 피살된 482구의 시신이 덕산 니켈광산에 매장돼 있었다.”

5 상륙작전 이튿날 인천시 풍경. 원본에는 “1950년 9월 16일 미해병 제1사단 5연대 병사들이 인천시가를 지나 전선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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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