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한국 경마, 패러다임을 바꿔라 (상) 영국 엡섬 더비 경주장 가보니

‘룰러 오브 더 월드(Ruler of the world)’가 지난 1일 영국 엡섬다운스 레이스코스에서 열린 더비(총 상금 137만9500파운드·31억3100만원)에서 우승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퀸즈스탠드’ 2층 발코니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엡섬(영국) 로이터=뉴시스]

‘경마는 도박이다’. 경마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다. 이 땅의 경마는 일제시대였던 1922년 시작됐다. 조선경마구락부를 주도한 회원과 마주는 총독부 고관 등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다. 경마를 즐기면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일제에 푼돈까지 뺏기는 우매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았다.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1980년대 이후 더 고착화됐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뚝섬경마장을 방문한 이후 경마장에는 대통령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한국 경마가 도박이라는 굴레를 벗고 건전한 스포츠와 축제, 탄탄한 산업으로 환골탈태할 순 없을까. 경마와 승마 선진국인 영국·독일을 둘러보며 그 가능성을 찾아봤다.


영국 런던 중심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인구 2만5000명의 작은 도시 엡섬. 지난 1일 엡섬으로 향하는 기차에는 검정 연미복을 입은 신사와 드레스와 모자로 한껏 멋낸 숙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가는 파티의 이름은 ‘더비 페스티벌’이다. 영국 여왕까지 참석하는 특별한 파티다. 엡섬다운스 레이스코스라는 경마장에서 말들의 질주와 함께 열린다.

 영국 최고의 경주마가 출전하는 더비는 1780년 1회가 열려 올해로 234회째다. 조선시대 정조 때 시작한 셈이다. 1·2차 세계대전의 포연 속에서도 거르지 않았다.

 인베스텍이라는 자산관리 및 투자 전문 금융회사는 5년째 더비를 후원하고 있다. 경마를 사행사업으로만 생각하는 한국에서는 금융 기관의 후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영국경마위원회 홍보 매니저 로빈 모운지는 “경마는 축구와 다를 게 없는 스포츠이자 축제”라고 말했다.

 더비가 열린 1일 앱섬다운스 레이스코스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이들은 계층별로 나뉘어 각자의 취향에 맞게 축제를 즐겼다.


 한국의 경마장과 가장 달랐던 건 다양한 호스피탤러티 프로그램이다. 독립된 공간에서 음식을 즐기며 경주를 관람할 수 있는 고품질 서비스다. 파라솔이 달린 데스크만 제공하는 100파운드(18만원)짜리부터 1인당 699파운드(126만원)에 이르는 호화 서비스까지 있다. 여왕이 관람하는 건물인 퀸즈스탠드의 독립된 방에서 고급 요리와 와인을 즐기다가 경기가 시작되면 발코니로 나가 경주를 관람한다. 엡섬 경마장 관리자 루퍼트 트레블리안은 “호스피탤러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은 약 4000명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영국 명물인 2층 버스는 더비에서도 인기가 높다. 경주로 앞에 줄지어 세워놓으면 독립된 파티 장소이자 즉석 관람대가 된다. 경주로가 시원하게 보이는 좋은 자리는 하루 주차 요금이 1950파운드(351만원)다. 기업 고객 프로모션 행사나 직원 사기 진작 파티로 인기가 좋다. 제임스 카튜(23)는 “친구 15명과 함께 왔다. 베팅을 하고, 돈을 따면 기분이 좋지만 그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기장 안쪽의 드넓은 잔디밭 공터에는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10만 명 중 약 7만 명은 이곳을 이용한다. 호스피탤러티 프로그램이 귀족의 파티라면, 이곳은 서민의 축제 마당이다. 가족·친구와 음식을 싸온 사람들로 드넓은 잔디밭이 가득 찼다. 아델 크레건(34)은 “더비가 열리는 날은 우리 가족 소풍날”이라고 말했다.

 더비가 열리면 이동식 놀이공원도 들어선다. 경주가 열릴 때도 쉬지 않고 각종 놀이기구가 돌아간다. 잔디밭 한쪽에서는 디제이의 음악 믹싱에 맞춰 젊은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춤을 춘다. 록 페스티벌 같은 분위기다.

 놀이공원 옆으로는 장도 섰다. 신발·찻잔·옷·장난감 가게는 물론 점성술을 하는 곳도 있다. 경마장 관리자 트레블리안은 “1834년 더비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도 사람들이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더비는 200년 넘은 전통이 빚어낸 풍경”이라고 말했다. 여왕은 이날 발코니에 앉아 세 시간 넘게 경주를 지켜봤다.

 더비를 매개로 왕실과 귀족, 서민들이 용광로처럼 어우러지는 게 영국의 경마 문화다.

엡섬(영국)=이해준 기자

◆더비=1780년 더비 백작이 친구들과 함께 3세마가 출전하는 경주마 대회를 만들었다. 경마계 유명인사였던 번버리 경과 대회 이름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 더비 백작이 이겼다는 야사도 있다. 더비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후에는 켄터키 더비 등 유명 경마 대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이 됐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