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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남북 적십자 회담’부터 76년 ‘판문점 도끼 만행’까지 … 생생한 분단 현장

1 강원도 철원군, DMZ 철책 바로 앞 원정리 역에 길게 누워 녹슬어 가는 기차. 60년 세월에 삭은 차체만 남아 이제는‘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2 양구의 제4땅굴. 본지 DMZ 탐방팀이 사단 공보장교의 안내로 땅굴을 둘러본 뒤 나오고 있다. 3 고성 DMZ 박물관에 전시된 전쟁 당시의 삐라들. 4 철원군에 있는 노동당사. 당사 기둥에 거칠게 파여 있는 총탄 자국이 6·25 당시 격전을 상기시킨다. 5 철원군 DMZ 내에 있는 원정리역. 최정동 기자
여름이면 늘 푸른 비무장지대(DMZ)의 이미지는 긍정적이다. 무기가 존재하지 않고,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왠지 싸움이 없고 안정적이며 조용을 넘어 고요할 것 같다. 하지만 한반도의 DMZ 사정은 그렇지 않다.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감격으로 눈물을 쏟게 하는 여러 사건·사고가 DMZ의 지난 60년 세월을 채워왔다.

 2012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1953년 정전협정 성립 이후 2012년까지 북한의 도발은 약 3000건이었다. 이 중 약 1000건은 군사분계선(MDL) 월선, 총·포격 도발, 습격 및 납치, 판문점 지역 미군에 대한 도발, 북한 경비정 북방한계선(NLL) 침범, 영공 침범, 포격 및 소규모 해전, 공중 공격, 미사일·대공포 사격 및 격추, 공중 납치와 폭파 등 국지 도발이다. 육(陸)·해(海)·공(空)의 차이는 있으나 국지도발 대부분은 DMZ 내의 도발이다.

 북한 도발은 1960년대에 1300여 건으로 가장 많았다. 김일성 주석은 66년 10월 5일 조선노동당 제4차 전당대표자대회에서 미국에 대한 강한 투쟁 의지를 표명하고 ‘남조선 해방 없이 조선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에 대한 북한의 적대행위가 확대됐고 DMZ에서의 사건도 증가했다. 68년에는 DMZ 중대 사건이 발생 날 기준으로 186일이나 되고 이로 인한 사망자도 국군, 미군, 민간인, 북한 무장간첩 등을 포함해 500명이 넘는다.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문이다. 북한의 ‘무장 공비’ 120명은 그해 10월 30일~11월 2일 사이 이 지역으로 세 번에 걸쳐 침투한 뒤 DMZ를 통해 복귀하려 했다. 우리 군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2개월 동안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고 그에 따라 DMZ에서는 끊임없이 총격이 이어졌다.

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도끼만행 사건. 북한군에 쫓긴 이 미군 장교는 결국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피살됐다.
미군 2명,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피살
1970년대 들어 남북 대화의 창이 열리면서 북한 도발은 점차 줄어갔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의 전체 도발 건수는 각각 230건, 230건, 300건이었다. 그러나 DMZ 도발은 각각 60건, 170건, 280건으로 비중은 여전히 높았다.

 그러다 ‘울진·삼척 무장 공비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76년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에서 발생한 사태다. 이유는 이랬다. 당시 공동경비구역(판문점)은 DMZ 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동서 800m, 남북 400m의 각이 둥근 직사각형 형태였다. 남북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왕래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후에 ‘8·18 도끼만행 사건’이라 부르는 판문점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유엔사 측은 남한 노무자 5명을 대동하고 판문점 내 미루나무의 가지 치기를 했다. 가지가 너무 무성해 북측 초소를 관측하는 남측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당시 유엔군 책임자는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였는데 북한군의 박철 대위를 위시해 11명의 북한군이 몰려와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그런데 듣지 않자 도끼를 휘두른 것이다. 현장에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바렛 중위가 살해됐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잘라내는 ‘폴 번연 작전’을 벌였다. 현장 저공에는 20대의 일반 헬기, 7대의 코브라 공격용 헬기가 떴고 그 위론 B-52 폭격기, F-4 전투기, F-111 전폭기가 날았다. 해상엔 항공모함 미드웨이함이 있었고 판문점 주변엔 중무장 미군, 한국군 기갑부대가 대기했다. 북한이 저항하면 즉각 공격하기로 했다. 위기는 다행히 김일성의 유감 표명 친서로 마무리됐다. 그 뒤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었고 양측은 철저히 자기 구역에서만 활동하고 분계선을 넘을 수 없게 됐다.

 8년 뒤 84년 판문점에서 또 긴장이 깔렸다. 당시 북한 안내를 따라 판문점을 관광하던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 바실리 마타우족이 갑자기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은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을 위한 탈출이었다. 북한 경비병이 마타우족을 겨냥해 분계선을 넘어 총을 쏘면서 유엔 측과 교전이 시작됐다. 이때 북한 측 판문점 일직장교가 다급히 군사정전위원회에 직통전화를 걸어 발포 중단을 요청함으로써 상황이 일단락됐다.

 ‘통계상’으로 보면 정전협정 위반이 북한에만 해당되진 않는다. 유엔사와 북한은 정전협정 위반에 대해 상호 통보를 해오다 94년 5월 북한 측의 일방적 중단으로 그쳤고 이후 유엔사도 공식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다. 53~93년까지 자료만 보면 유엔사 측이 집계한 북한 측의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약 41만4000건, 북한 측이 집계한 유엔사 측의 위반은 약 81만3000건이다. 가장 많은 위반의 1, 2, 3순위는 양측 모두 일치한다. 완장 불착용 위반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자동화기 반입과 요새·진지 구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상대의 위반 지적을 부인해 시시비비를 엄격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북측, 부라보콘 건네자 “미제 아닙네까”
DMZ의 현재 상황만을 보면 양측 모두 정전협정을 어긴 것 같다. 협정에 따르면 DMZ는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의 폭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북 각각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남하시키거나 북상시켰다. 또 한계선을 이동시키면서 모두 병력·화력도 함께 이동·배치해 DMZ 내에 무장 병력과 화력이 존재한다. DMZ 내에는 최전방 경계초소(GP)·감시초소(OP), 방송·지원 시설, 지뢰·자동화기·수류탄 등 다수의 무장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명칭은 DMZ, 즉 비(非)무장지대지만 실제로는 무장지대인 셈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먼저 한계선을 이동시킨 것은 북한이었고 우리 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진한 것”이라며 “DMZ 내 무장도 역시 북측이 먼저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연도별로 유엔사 측과 북한 측이 서로에게 제시한 정전협정 위반 건수의 추이를 보면 비슷하다. 대체로 유엔사 측이 북한 측의 위반이 많다고 지적한 해에는 북한이 집계한 유엔사의 위반 건수도 많다. 한쪽이 위반하면 다른 한쪽도 위반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회의장에서도 마찬가지다. 60년대 어느 날, 유엔군 측 대표가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장에 들어서니 공산군 측 의자 높이가 달라졌다. 남측 의자보다 높게 만들어 공산군 측이 남측을 내려다보게 만든 것이다. 그러자 남측도 의자를 높여 공산군 측이 거꾸로 남측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되자 양측 대표의 머리가 모두 천장에 닿을 지경이 돼 양측 모두 유엔군 측에서 제공하는 같은 의자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웃고 화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DMZ가 위반·사건·사고로만 얼룩졌던 것은 아니다. 70년대부터는 남북 교류의 장이라는 역할을 개시했다. 특히 판문점이 핵심 무대였다. 정전 이후 60년대까지는 남북대화가 드물었지만 70년대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서 본격적인 판문점 대화 시대가 열렸다. 71년 예비회담을 통해 72년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은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회의장을 대화 장소로 사용했다. 그러면서도 까칠한 상황이 이따금 발생했다. 한 지역 언론에 따르면 72년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우리 측 관계자가 북측 대표단에 아이스크림 ‘부라보콘’을 권했다. 그러자 북측 관계자는 “이거 미제 아닙네까”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후 80년대에는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 남북경제회담, 남북국회회담, 남북체육회담, 수해물자 인도·인수를 위한 남북 접촉, 남북적십자회담,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등 70년대보다 훨씬 다양한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80년대 후반부터는 판문점을 통한 남북 민간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전대협 대표로 파견된 임수경(현재 민주당 의원)이 허가 없이 판문점을 통과해 귀환하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90년에는 국악인을 중심으로 한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등이 판문점을 거쳐 북한을 방문했다. 91년에는 판문점에서 남북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가졌고 북측 여성대표들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을 방문, 남북 여성대표 접촉이 이뤄지는 등 다양한 교류가 이어졌다. 하지만 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남북대화가 뜸해지고 또 2000년대 들어와 개성·금강산이 회담 전용 장소로 등장하면서 판문점은 대화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DMZ, 즉 비무장지대가 한반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해외의 논문에 따르면 DMZ 폭이 2㎞ 이상인 경우 폭이 그보다 좁거나 아예 없는 경우보다 평화 유지 수준이 높았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른다면 DMZ를 통한 남북의 평화를 충실히 유지하기 위해 정전협정상의 ‘폭 4㎞’ 규정을 지켜야 하고 따라서 남하하거나 북상한 북방·남방 한계선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경제희 일본 게이오대학 정치학 박사. 『비무장지대 가치 인식의 계량적 분석』 『통일문제연구』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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