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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시절 ‘우유 도둑’ 별명 … 대처리즘 초기엔 고전

지난 4월 17일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열린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현직 지도자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노동앞줄 왼쪽에서 둘째), 존 메이지 전 총리(보수넷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보수여섯째) 등 보수·노동당 양당 정치인이 고루 모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부(오른쪽 두사람)도 참석했다, [중앙포토]
1979년부터 11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마거릿 대처(1925~2013)만큼 개성이 강한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지지자에겐 희망으로, 비판자에겐 악몽으로 각인돼 왔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⑨ 마거릿 대처

대처 리더십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보수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원칙이다. 대처는 하원의원에 첫 출마한 50년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우리는 이 나라가 지금까지 몰랐던 거대한 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노예가 되는 삶과 자유를 지향하는 삶, 이 두 가지 방식 간의 싸움이다. 반대편에선 보수주의가 소수의 특권을 위한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보수주의는 우리나라의 전통에서 가장 위대하고 최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가진 최상의 신조는 국가의 단결이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를 지향할 뿐 다른 계층에 맞서는 하나의 계층을 추구하지 않는다. 시기나 증오를 퍼뜨려서는 위대한 나라나 인간 형제애를 이룰 수 없다.”

이는 49년 뒤 총리에 오른 대처의 정치적 신념과 큰 차이가 없다. 그가 신념과 원칙의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런 신념과 원칙은 거대한 개혁을 이뤄냈다. 국영기업 민영화, 규제완화, 재정지출 억제, 작은 정부, 자유경쟁시장, 노조활동 규범화가 그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추구한 레이거노믹스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정책들은 대처리즘으로 불리면서 지금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국 총리 중 자신의 정책에 ‘이즘(주의)’이 붙은 인물로는 대처가 유일하다. 대처리즘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 엄청난 흔적을 남겼다.

경쟁력 강화해 나라 살려 … 평가는 극과 극
대표적인 게 국영기업 민영화다. 대처가 총리가 될 무렵 영국은 물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선 심지어 보수주의 세력조차 거대기업의 국영화를 당연하게 여겼다. 노동당이 오랫동안 ‘거대기업의 도산을 막고 고용을 보장해 국민경제를 지킨다’는 논리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거대기업의 경영이 어려우면 국유화, 이른바 국민기업화를 통해 정부 재정지원으로 적자를 메우는 걸 당연하게 여긴 유럽 기업문화의 풍토도 한몫했다. 영국철강이나 롤스로이스를 비롯한 자동차회사, 영국항공 같은 항공사, 브리티시텔레콤 같은 통신회사, 훗날 글로벌 기업이 된 BAE 같은 우주항공업체, 석유·가스회사, 철도회사 등이 모두 국영기업이었다. 대처는 이들 회사를 줄줄이 민영화시켰다. 노조와 야당이 격렬히 반발하는 것은 물론 보수당 내 상당수도 이에 반대했다. 온정주의 정책을 포기하면 표밭이 날아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대처는 민영화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해야 장기적으로 국가 부담을 덜 수 있다고 판단해 이를 멈추지 않았다. 곳곳에서 아우성이 넘쳤지만 특유의 독설과 뚝심,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그 뒤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심지어 과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건설해 서민에게 싼값에 임대해 주던 공공주택도 민영화했다. 세입자가 원하면 집값을 나눠 내게 했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여러 채를 불하해 임대사업을 할 수 있게 허용했다. 서민이 ‘집세 지옥’에 시달릴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민영화 기업이 탐욕스럽게 이익을 챙겨 소비자가 손해를 보고 일부 공무원이 자기 이권을 챙길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오히려 정보통신 분야의 경우 민영화 이후 기업체질이 개선돼 통신료가 내려가는 등 공공 이익에도 기여했다. 반면 철도 민영화는 오히려 요금 인상과 적자노선 폐쇄, 정비인력 감축에 따른 사고 발생 증가 등 부정적인 면이 적지 않았다.

민영화는 요즘 재정위기를 겪는 유로존 국가들이 금과옥조처럼 채택하고 있다. 인도는 경제발전과 외자 유치, 주식시장 활성화의 촉매제로 활용해 왔다. 특히 90년대에 공산체제가 붕괴된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대처리즘 방식을 적극 도입했다. 민영화는 동유럽 자본주의 확산의 핵심이었다.

재정지출 억제는 미 연방정부가 즐겨 사용한다. 규제완화는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영국은 규제완화로 자국 금융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자유시장 추구도 마찬가지다. 대처 이전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그리 익숙한 용어가 아니었다. 대처는 정치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처는 노조활동의 규범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동조 파업이나 노조 의무가입제를 법으로 금지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을 하려면 조합원 투표를 거쳐야 했으며 노조는 조합원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대처는 타협으로 노동쟁의를 무마하려 들지 않았다. 84년 광부 파업은 12개월간 계속됐음에도 결국 대처의 확고한 원칙주의 앞에 무너졌다. 그 결과 적자 탄광의 상당수가 폐쇄되거나 민영화됐다. 역사학자 유고 영은 “대처는 승리하고 싶었지만 대중에게 웃는 낯으로 다가간다고 해서 이길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대처의 힘은 원칙에 따른 단호한 결단과 추진력 그리고 법치 존중에서 나왔다”고 평가했다.

‘정치적 연인’ 레이건과 공산체제 붕괴 견인
영국의 첫 여성 총리였지만 그는 오랫동안 형극의 길을 걸었다. 야당 당수이던 78년 집권 노동당은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해 교육·보건 분야 공공지출을 대폭 줄였다. 노조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라 불린 암울한 시기였다. 노동당이 심각한 당내 갈등을 겪는 사이에 대처는 이듬해 총선에서 비교적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국가의 자살’을 막으려던 조치가 자충수가 돼 ‘노동당의 자살’을 부른 것이다. 뒤이어 집권한 대처는 재정긴축을 강화하면서 이를 나라를 살릴 십자군에 비유했다. 부가세를 종전의 두 배인 15%로 올렸으나 소득세 최고세율은 83%에서 60%로, 기본세율은 33%에서 30%로 오히려 내렸다. 투자의욕을 높이겠다는 명분에서다. 그 뒤 10년간 최고세율은 40%로, 기본세율은 25%로 올라갔다. 79~80년 재정긴축 덕에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잡혔으나 실업률은 두 배 수준으로 높아졌다. 영국 기업 중 15%가 문을 닫았으며 나라가 갈수록 불균형적이고 불평등적으로 변한다는 비판이 넘쳤다. 지식인들은 대처 때리기에 앞장섰다. ‘우유 도둑’이란 별명을 붙여 그를 조롱했다. 70년 에드워드 히스 총리 정권에서 교육과학부 장관을 맡았을 때 7세 이상 어린이의 우유 무상급식을 중지하고 급식비를 인상했기 때문이다. 복지병을 치유해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조치였지만 이는 훗날 평가이지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집권 후 2년간 대처는 대중의 외면 속에서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총리가 됐다.

하지만 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하면서 대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대반전에 성공했다. 잘 알려진 대로 흔들리지 않고 전쟁을 수행한 대처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83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이 안겨준 선물이었다.

대처는 보수당 안에서는 개혁주의자로 통한다. 75년 당수가 될 당시 그는 자신을 키워준 정치적 스승인 에드워드 히스를 상대로 당권 도전에 나섰다. “테드(에드워드의 애칭)에겐 개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과거에 얽매인 정치인은 물러나야 한다.”

영국 역사상 여성으론 처음으로 주요 정당의 대표가 된 대처가 가장 역설한 것은 변화와 개혁이었다. 당시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대처를 ‘아름다운 투사(bonny fighter)’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대처는 열심히 일해 성공으로 보상받는 윤리를 신봉한다. 그 자신이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노력과 능력, 그리고 용기로 지금 자리에 올랐다. 아무런 재산도 특권도 물려받은 게 없다. 부유함에 대해 원죄의식이 있는 20세기 보수당의 치명적이고 특징적인 결점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대처는 총리가 된 뒤 새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대표적인 게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민주화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한 것이다. 만델라가 몇 년 뒤 감옥에서 풀려나 남아공을 다수 흑인통치로 평화롭게 전환하는 영웅이 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적 연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련에 강력하게 맞서 공산체제의 붕괴를 이끌어낸 것은 대처의 큰 업적이다. 대처는 “소련의 군사력은 사용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여기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한 뒤 소련 측 미디어는 그를 ‘철의 여인(iron lady)’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대처는 이를 자신의 별명으로 삼을 만큼 결연함을 보였다. 하지만 84년 4월 미국이 영국 보호령인 그라나다를 침공할 당시 아무런 사전 자문이나 통보를 받지 못해 물을 먹기도 했다. 아무리 동맹국가이고 개인적으로 친해도 국익 앞에서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보여준 사례다.

마거릿 대처 총리(오른쪽)와 남편인 사업가 데니스. 젊은 시절 그는 학업과 육아, 정치를 동시에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다. [중앙포토]
쌍둥이 출산, 변호사 시보 병행한 억척 여성
‘고집’은 대처 리더십의 장점 중 하나이자 결점이었다. 특히 시대의 대세였던 유럽통합에 끈질기게 반대해 문제를 일으켰다. 90년 11월 자신의 오른팔이던 제프리 하우 외무장관이 대처의 유럽통합 전략에 반발해 사임하면서 대처의 당내 위상은 휘청거렸다.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결국 대처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대처는 51년 부유한 사업가인 이혼남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으며 53년 쌍둥이 마크와 캐럴을 낳았다. 54년 런던의 유명 법학원인 링컨스인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영국에선 대학졸업자가 법학원에 들어가 1년간의 수업과 1년간의 시보(試補) 생활을 거쳐 일부만 변호사가 된다. 결혼과 출산, 변호사 수업을 한꺼번에 해치운 억척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경력이다. 이런 억척스러움은 대처 리더십의 핵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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