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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신사임당과 김치냉장고

은행털이는 영화의 단골 소재다. 현실 세계에도 영화만큼 다양한 은행털이범이 있다. 총이나 칼을 들고 창구 직원을 위협해 현금을 뺏는 강도부터 첨단 터널 굴착장비를 동원해 땅굴을 파는 도둑까지 말이다. 하지만 은행털이는 감수하는 위험에 비해 남는 장사가 못 된다. 위험은 무한대, 수익은 마이너스로 수렴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은행 점포 한 곳의 동전·지폐를 다 쓸어 담아 봐야 몇 억원 정도다. 돈 장사를 하는 은행에서 이자가 붙지 않는 현찰을 많이 갖고 있을 이유가 없는 데다 요즘엔 현찰을 찾는 고객도 많지 않아서다. 수십억, 수백억원을 기대한 강도라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영화 ‘다이하드3’에서처럼 수십조원어치의 금덩어리를 보관하는 ‘난공불락’ 미 뉴욕연방은행 지하금고라도 턴다면 모를까.

현찰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만 들고 다녀도 큰 불편이 없다. 굳이 현찰이 필요한 경우라면 경조사비나 팁을 건넬 때, 노점상을 마주할 때다. 그게 아니면 뇌물을 주거나 마약 매매 등 불법거래를 하는 경우다. 영수증과 세금을 원초적으로 싫어하는, 넓은 의미의 ‘지하경제’와 대면할 때다.

이런 관점에서 고액의 현찰을 입금하거나 출금하는 건 그 자체가 수상한 행위다. 2000만원 이상의 고액 현금 거래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되는 까닭이다. 잔머리를 굴려보자. 1900만원씩 여러 번에 걸쳐 현찰을 입출금하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홍보하는 거다. “나는 구린 데가 많다.” 금융재산이 불법이거나 금융거래자가 자금세탁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데 매우 충분한 ‘분할거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거래엔 의심딱지가 하나 더 붙는다.

이런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인데 박근혜정부 출범 후 고액예금을 5만원권으로 뽑아가고 있다고 한다. 당국도 ‘지하경제와 관련 있는 현상’으로 보고 모니터링을 한다니 헛소문만은 아닌 듯하다. 품귀현상까지 빚는 5만원짜리, 한국 화폐 속 첫 여성얼굴 신사임당처럼 매우 귀하신 몸이 됐다. 5만원권을 모실 쇠금고의 대용품으로 김치냉장고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할 소문인데 이유는 참 그럴듯하다. 금고와 장롱을 뒤지는 도둑의 허를 찌르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돈다발이 말라붙어 ‘떡’이 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단다.

박근혜정부 들어 돈 주인들이 금쪽같은 이자를 포기하고 현찰 5만원권을 수집하는 이유는 뭘까. 지하경제를 옥죄는 조치들이 손꼽힌다.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 확대(4000만원→2000만원 이상), FIU 정보의 국세청 통보 추진, 세무조사 강화 등 여럿이다. 충격조치로 화폐개혁이나 리디노미네이션(액면 절하)이 추진될 수 있다는 황당 루머까지 나돈다.

국내외적으로 지하경제의 주인공들은 걱정거리가 좀 많아졌겠다. 국경 너머에 숨겨 놓은 돈의 안전마저 걱정스러운 상황 아닌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이 ‘은밀하게 위대하게’ 까발려지는 판국이다. 5만원권의 퇴장(退藏)은 지하경제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규모조차 헤아릴 수 없는 들쭉날쭉 지하경제의 심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지상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세금 더 걷으려다 경제활동만 얼어붙게 하는 건 아닌지, 지하 1층 경제를 양성화하려다 오히려 더 깊이 숨는 지하 2층 경제를 활성화하는 건 아닌지…. 월급쟁이들도 ‘유리지갑’ 만지며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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