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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잠언 가득한 니체의 문장 … 그 속의 권력욕

니체의 문체

하인츠 슐라퍼 지음

변학수 옮김, 책세상

301쪽, 1만7000원




19세기 말에 철학은 가장 급진적인 자기비판에 도달한다. 그 동안 철학이 목표로 삼아온 도덕·이성·정신이 실은 비합리적 의지, 이해, 욕망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아래에서 ‘의지’를, 마르크스는 이념 아래에서 ‘물질적 이해’를, 프로이트는 의식 아래 ‘욕망’을 읽었다.



 명령이나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에 따라,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에 따라 판단한다. 그럼 헌법의 올바름은 정작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헌법은 합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래 혁명이나 전쟁이나 쿠데타와 같은 폭력의 산물이었다. 나치의 집권이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민주적 방식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공리는 증명을 요하지 않기에 ‘공리계’를 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수학적이지 않은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은 이성적으로 수립되지 않았고, 헌법은 합법적으로 구축되지 않았으며, 도덕은 도덕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니체의 매력은 그 급진성에 있다. 그는 ‘모든 이성적 질서가 거기서 흘러나오나 그 자체로는 비이성적인’ 그 어두운 근원을 용감하게 직시하고,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기꺼이 ‘운명애’로 수용한다.



 하이데거는 ‘근원적 진리’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詩作), 철학적 사유, 국가의 건립을 제시한다. 예술과 철학과 정치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면, 학자들은 그렇게 열린 세계에 들어와 뒤늦게 개념정리나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세 가지 모두에 관계한다. 니체의 사상은 파괴를 곧 창조로 알았던 모더니즘 예술의 원리이자, 이성주의를 비판하는 후기 구조주의자의 철학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나치의 정치학이기도 했다.



 니체의 문체는 그가 설파하는 ‘진리’의 이 독특한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책에 인용된 니체의 원문을 독일어로 소리 내어 읽어 보라. 그 리듬감에 놀랄 것이다. 니체가 산문에 운문을 도입한 것은, 그가 설파하는 진리가 새로운 세계를 개시(開示)한다는 의미에서 ‘시적’ 진리임을 의미한다. 니체는 자신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속한다고 믿었다. 니체의 진리는 ‘논증’되지 않는다. 그저 ‘선포’될 뿐이다.



 니체가 후기에 즐겨 사용하던 잠언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알 듯 모를 듯 툭툭 던지며 지나가는 잠언은 명제와 명제 사이에 꼼꼼히 논리적 연관을 따지는 ‘논증적’ 담론의 형식과 구별된다. “산에서 산으로 갈 때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다리가 길어야 한다. 잠언은 봉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몸짓이 크고 키가 껑충 큰 자라야 잠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



 니체의 말대로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그 글이 읽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잠언은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독자를 도취시켜 부지불식간에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잠언에서 화자와 청자는 평등하지 않다. 잠언의 화자는 ‘지도자’이며, 잠언의 청자는 ‘추종자’다. 잠언의 청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저 발화된 문장을 암송할 뿐이다.



 니체의 ‘문체’(style)는 그의 문장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양식’(style)이기도 했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나는 왜 운명인가?’라 물으며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철학적 물음을 제기했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만 쓰는가?’ 이것이 니체의 ‘존재미학’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위험이 따른다. 니체에 대한 인기는 독일사회에 ‘스타일’과 ‘지도자’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결국 독일적 ‘스타일’에 대한 열망은 스파르타-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양식으로 실현됐고, 천재적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정치와 예술의 천재라는 총통의 인격으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게오르크 루카치는 니체의 비합리주의에서 ‘이성의 파괴’를 보았다.



 하지만 이성의 파괴가 곧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성 너머의 더 높은 진리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는 니체의 창조적 잠재성을 보여준다. 푸코의 계보학, 데리다의 해체주의, 들뢰즈의 유물론 등은 니체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니체의 수용은 아직도 이 두 극단을 오간다. 패전 이후 독일이 니체를 너무나 쉽게 파시즘의 원흉으로 단죄했다면,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쉽게 그를 ‘탈-나치화’하려 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저 나치들에게 악용된 데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에게는 실제로 프로토(proto·원형)-파시스트의 면모가 있다.



 니체는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쿠르트 투홀스키의 말이던가. “내게 니체의 인용문을 달라. 그러면 그와 반대되는 그의 또 다른 인용문을 찾아주겠다.” 그의 사상에는 가장 보수적인 파시즘부터 가장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의 요소가 공존한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두 극단적 해석의 놀이가 끝나고, 최근에는 니체의 ‘문체’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기존의 철학이 안전하게 마련된 부지 위에 놀이공원을 짓는 작업이라면, 니체의 사상은 길을 내기 위해 전인미답의 위험한 아마존 정글에 뛰어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니체의 사상은 야성적이나, 그것을 제대로 수용하는 데에는 극도로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 감각 없이 문체만 흉내 낼 생각일랑 접는 게 좋다. 그 경우 야성은 야만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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