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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행복한' 부부, 그 허위를 벗기는 날 선 문장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444쪽, 1만3800원


그의 문장은 양궁으로 치면 ‘퍼펙트 골드(Perfect Gold)’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그의 시선은 본질을 겨냥한 그대로 독자의 마음자리에 정확하게 와 꽂힌다. 제임스 설터에게 미국 생존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사가 붙은 까닭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2010년 그의 단편집 『어젯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을 때 독자들이 뒤늦게 그를 만난 걸 억울해했을 정도였으니….

 이번에 번역·출간된 『가벼운 나날』(원제 Light Years)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이다. 그가 올해 발표한 장편 『올 댓 이즈』(All That Is)도 언론과 독자의 주목을 받으며 그의 이름값을 확인시켰다.

 『가벼운 나날』의 구조는 단순하다. 네드라와 비리 부부의 결혼 생활이 중심축이다. 건축가인 남편 비리와 전업주부인 아내 네드라. 뉴욕 인근의 교외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사는 이들 부부의 일상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딸을 키우는 부부의 평범한 생활, 친구들과 즐기는 저녁 식사와 대화, 주변 사람들의 스토리가 소설을 채워간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혼 생활의 마모된 비석들’로 가득한 공동묘지 같다.

 작가는 완벽한 결혼생활이란 유리 그릇 속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선언한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라고.

 그렇기에 가장 평온하고 안온한 삶이 가장 위태롭다. 가까이 살펴보면 미세한 균열과 붕괴의 조짐이 보인다. 결혼이라는 ‘협정’의 당사자가 된 남편과 아내는 ‘행복한 부부’라는 허위와 거짓에 둘러싸인 배역에 충실할 뿐이다. 부부는 각기 다른 욕망과 사랑에 빠져든다.

 사실 이 소설이 매혹적이며 무서운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소설은 잔잔한 호수의 표면 같다. 나른할 정도로 단조롭다. 이른바 극단적인 사건, 폭발하는 격정이 없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 이유는 문장이다. 그의 문장은 힘이 세다. 미문도 아니고, 어려운 수사나 관념이 늘어서 있지 않지만 서술의 깊이는 압도적이다.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대로다.

 지적이며 철학적 통찰이 배어든 문장을 마주하며 독자는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다. 설터의 문장이 던지는 진폭에 공감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이라 말하며 결혼이라는 계약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삶은 흉터로 나뉜다. 인생 초기에 생긴 흉터들은 더 촘촘하다. 시간에 압축된 듯, 이십 년 세월의 상처들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은 나이 듦에 대한 멋진 비유로 읽힌다.

 197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글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인공 네드라는 칸딘스키의 책을 읽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랗다”고. 이 책을 읽는 것은 내면을 파고드는 가느다란 문장의 숲을 거니는 즐거운 산책이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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