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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아웅산·우탄트 '기억의 장소'를 가다

아웅산 동상(양곤의 칸도지 호수 입구). 독립군을 이끌 때 모습으로 그의 실제 키 크기 정도다.
미얀마(Myanmar·옛 버마) 풍경은 달라진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가 출렁인다. 역사 분야의 풍광도 바꿨다.

영웅의 귀환
1990년대 신군부 '미얀마 봄' 막으려 아웅산 격리 …
테인 세인의 ‘역사 개방’은 민주화·개혁을 촉진한다

 군부 집권 반세기(1962~2011년 3월) 동안 나라는 초라해졌다. 군부는 역사를 통제했다. 체제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20세기 미얀마의 영웅은 아웅산 장군이다. 그는 독립, 자유, 애국, 통합의 압도적인 표상이다. 그의 딸 아웅산 수지는 민주화 투쟁의 간판이다. 아웅산 장군은 아웅산 수지를 떠올린다. 신군부는 아웅산의 신화와 상징성을 제어했다. 미얀마는 1960년대 유엔사무총장(우탄트)을 배출했다. 군부는 우탄트의 성취도 묵살했다. 신군부는 2005년 11월 수도를 네피도(Naypyidaw)로 옮겼다. 군부는 왕조시대의 영웅을 재발굴했다. 정복 왕들의 거대한 동상을 세웠다. 그것은 국민적 숭배 영웅의 재구성, 교체 시도였다.

 2011년 4월 출범한 민선 정부의 개혁과 민주화는 역동적이다. 영웅의 역사는 귀환했다. 아웅산 박물관은 다시 문을 열었다. 아웅산 묘소는 이달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우탄트의 공간도 국민의 삶 속에 복귀했다. 상실된 역사의 해금(解禁)-. 지난달 나는 그 사연과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Yangon·옛 랑군)-. 밍글라돈 국제공항은 한적했다. 나라의 침체를 드러낸다. 그곳은 60년대 중반까지 동남아 허브공항이었다.

 호텔에서 나는 달러를 환전했다. 화폐는 위인을 새긴다. 미얀마 돈(찻·kyat)에는 사람이 없다. 친테(chinthe·사자)가 있다. 고액권은 흰 코끼리, 국가 문양(紋樣)이다. 친테는 수호신, 흰 코끼리는 상서로움을 의미한다. 옛 지폐는 보족(장군) 아웅산 (Bogyoke Aung San)의 얼굴을 넣었다. 아웅산이 지폐에서 사라진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그의 딸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가 반(反)군부, 민주화 투쟁에 본격 나선 때다. 아웅산 사진이 시위현장에 등장했다.
 
 “아웅산의 이름은 딸의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해 준다. 군부 지도부는 기억의 연상 작용, 후광효과를 차단하려 했다. 토착 신앙 낫(nat)의 영향도 있다. 미얀마 정치문화의 독특한 부분이다. 아웅산 영웅의 정령(精靈)이 딸에게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군부는 아웅산 없는 지폐를 새로 도안했다.”(장준영 박사, 한국외대 동남아 연구소 책임연구원)

 그 무렵 관공서 벽의 아웅산 초상화·사진은 떼어졌다. 군부는 아웅산 묘역을 닫았다.

 나는 아웅산 국가 묘역으로 갔다. 묘소는 쉐다곤 북문 앞길 건너 언덕에 있다. 쉐다곤 파고다는 불교국가 미얀마의 장엄한 상징이다. 금으로 뒤덮인 거대한 불탑(佛塔)이다. 그것으로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다.

 아웅산 묘소는 한국인의 기억 속 상처다. 1983년 10월 9일 북한 공작원의 묘소 폭발 만행 때문이다. 묘소는 1년에 하루 문을 열었다. 순교자 날(7월 19일)이다. 1947년 그날 아웅산(1915~47)은 정적(政敵)의 하수인에게 암살당한다. 묘소는 쇠창살 문 안에 있었다. 추모탑의 붉은색은 강렬하다. 독립 영웅의 32세 짧은 삶처럼 비장함을 표출한다. 쇠창살은 영웅과 국민의 격리였다.

 올 6월부터 아웅산 묘소의 문이 열렸다. 일반 공개는 민주화의 진전이다. 테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 정부의 여론 존중과 정책 변화는 속도감이 넘친다.

 묘소에서 10분 자동차 거리에 아웅산 수지의 집이 있다. 88년 영국 생활 24년 만의 귀국 후 살던 집이다. 군부는 아웅산 수지를 그 집에 묶어두고 감시했다. 2010년까지 22년간 세 차례(전체 15년) 가택 연금을 했다. 이제는 관광 촬영 명소다. 집 정문 가운데 아웅산 사진이 걸려 있다. 플래카드는 아웅산 어록을 적었다. ‘국민과 나라의 기본을 확실히 수행하자’-. “민주화 투쟁 시절 용기를 북돋워준 말이었다”고 관광안내원은 설명한다.
 
1 군총사령관 시절(2008년 3월 국군의 날) 탄슈웨의 네피도 연병장 사열 모습. 고대 왕조의 위대한 세 명의 ‘전사(戰士) 왕’ 동상이 서 있다. 2 1990년대 나온 미얀마 새 지폐(오른쪽)는 아웅산(왼쪽은 옛 화폐, 독립운동 때 사진)을 빼고 수호신 사자상을 넣었다. 3 옛 수도 양곤의 자동차 물결. 프로축구 광고판은 축구 인기를 반영한다. 4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군부는 아웅산 신화를 경계했다. 영웅의 전설이 민주화 열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막았다. 구(舊)군부의 네윈 때보다 심해졌다. 나는 신군부의 지배자였던 탄슈웨(Than Shwe·1933~)를 알아야 했다. 군부 통치는 49년이다. 권력자는 네위(26년)→소 마웅(4년)→탄슈웨(19년) 세 명이다. 탄슈웨의 권력 관리는 노련했다. 타이밍과 전격성을 배합했다. 전임자와 경쟁자(킨늉 총리)를 권좌에서 축출했다.

 네윈은 88년 7월 퇴장한다. 그의 ‘버마식 사회주의’ 독재는 최빈국의 불명예를 낳았다. 그해 8월 8일 반정부 시위는 절정이었다. ‘8888’세대의 등장이다. 아웅산 수지는 민주화 가도에 뛰어들었다. 9월 신군부는 친위쿠데타로 반격했다. ‘양곤의 봄’은 짧았다. 진압과 유혈로 얼룩졌다.

 계획도시 네피도는 철권 통치자 탄슈웨의 작품이다. 양곤은 아웅산의 도시다. 신군부는 그 도시의 역사성과 결별했다.

 수도 이전은 여러 관측을 낳았다. 미군의 공격 가능성 때문에 내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점성술(占星術) 영향이라는 소문도 있다. 미얀마 안내인은 “양곤의 행정 부처가 네피도로 처음 옮긴 게 2005년 11월 오전 6시37분이다. 점성술사가 시점을 정해줬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했다.

 네피도의 뜻은 왕도(王都)다. “수도 이전에는 군부가 왕조의 정통 후예라는 배타적 자부심이 깔려 있다. 신군부는 왕조의 계승 이미지를 확보하려 했다.”(박장식 부산외대 교수)
 
5 미얀마가 배출한 유엔사무총장 우탄트의 묘소. 6 아웅산 국립묘소. 군부 통치 시절 출입을 막았다(올 6월부터 일반에 공개). 7 아웅산 박물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살던 집. 8 아웅산이 탔던 영국제 월슬리 세단. 9 아웅산 수지의 집. 플래카드 위는 아웅산 사진.▷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네피도는 양곤에서 북쪽으로 320㎞ 떨어져 있다. 8차로 고속도로를 다섯 시간쯤 탄다. 네피도의 랜드마크 ‘우파다산티’(Uppatasanti)’ 파고다-. 안내문에 따르면 ‘재앙을 막는다’는 뜻의 불탑이다. 쉐다곤 파도다에 비해 30㎝쯤 낮다(99m). 네피도는 크고 넓다. 인구는 92만 명. 광활하고 한적한 수도 풍광은 이질감을 극대화한다.

 탄슈웨는 그곳에 왕조 시대 영웅의 동상들을 세웠다. 태국·라오스를 공략하고 나라를 통합한 전사(戰士)왕들이다. 11세기 아노여타(Anawrata), 16세기 버잉나웅(Bayinnaung), 18세기 알라웅퍼야(Alaungpaya)다.

 그 사연은 나의 추적 대상이다. 동상은 군 연병장에 있다. 관광객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나는 미얀마 국군의 날(3월 27일) 녹화 동영상을 살폈다. 연병장은 한국의 옛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을 떠올린다. 세 명의 왕은 꽃으로 치장한 스탠드 위에 서 있다. 12m 크기로 위압적이다. 왕조시대의 독특한 갑옷과 투구에다 무기를 든 모습이다. 양곤의 무역상 마웅 밍(46)은 “동상의 화려한 모습은 국민에게 각인됐다. 군부는 아웅산의 존재감을 약화시키려 했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평화발전위(SPDC)의장 탄슈웨는 특정일에 언론에 등장했다. 동상을 배경으로 한 탄슈웨의 모습은 시위 효과를 거뒀다.

양곤 거리는 자동차 물결이다. 대부분 일본 차다. “러시아워가 따로 없다”고 한다. 양곤에 외국의 기업·정부관계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열풍이 분다. 미얀마가 뿜어내는 자원부국의 경제 잠재력, 외교·군사의 지정학적 매력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나라’에서 ‘기회의 땅’으로 바꿨다.
 
아시아 첫 유엔사무총장 우탄트 묘소 앞의 필자.
나는 ‘아웅산 박물관’을 찾았다. 아웅산이 2년여 살던 집이다. 62년 박물관이 되었다. 2007년 9월 제2의 민주화 유혈 시위(샤프론 혁명)가 있었다. 그 무렵 박물관도 폐쇄했다. 기억의 장소 차단은 ‘미얀마의 봄’을 막기위해서였다. 지난해 3월 다시 문을 열었다.

 정문 바로 안쪽에 차고가 있다. 검은색 세단이 보인다. ‘영국제 월슬리(Wolseley)’라는 안내문이 있다. ‘더 레이디(the Lady)’의 첫 장면에 나오는 차다. 영화는 아웅산 수지의 민주화 투쟁을 다뤘다. 아웅산은 암살당한 날 출근길에도 그 차를 탔다. 세단은 접이식 철문 안에 갇혀 있다.

 나는 “사연 많은 올드 카(1937년식)를 꺼내 전시할 수 없을까”라고 했다. 미얀마 안내원은 “사회 분위기가 아직 관광 마인드에 약하다”고 했다.

 2층 집은 영국풍이다. 1층에는 그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 속 복장은 일본군·영국군 차림, 전통 복장들이다. 짧지만 치열했고 파란 많은 삶을 반영한다. ‘30인 동지’ 시절 군대 창설, 영국에 대한 항쟁, 일본군과 협력, 다시 항일 투쟁-. 2층은 그의 검소한 삶이 전시돼 있다. 세 자녀(2남1녀)의 나무 침대가 놓여 있다. 아웅산이 모은 200여 권의 책, 연설문도 눈에 띈다. “힘이 있어야 기회가 있다. 힘이 있는 만큼 기회도 찾아온다”-. 준비하는 지도력의 통찰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군대의 아버지’다. 군대를 창설했지만 군의 정치 참여를 반대했다.

 정원은 제대로 가꾸지 않았다. 연못은 흙바닥이 드러나 있다. 50대 후반의 남녀 다섯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통치마 ‘롱지’를 입었다. “밍글라바(안녕하세요)”로 인사를 나눴다. 인솔자가 “안녕하십니까”라고 받는다. 한류 드라마의 위력이다. 그는 퇴직한 교사(우 베잉·59)다. “20년 만에 다시 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부러워했다. “한국(61년 5·16 박정희)과 미얀마(62년 3·2 네윈)는 비슷한 시절 쿠데타가 있었다. 한쪽은 경제 기적, 우리는 최빈국이 되었다.” 회한을 토로했지만 조심스러워했다. 독재체제 아래의 말 습관일 것이다. 네윈의 폐쇄 체제는 자발적 선택이다. 풍부한 자원을 믿었다. 하지만 그런 체제의 속성은 억압과 공포, 침체를 생산한다. 리더십을 잘못 만나면 나라는 절단난다.

 나는 칸도지 호수로 갔다. 서쪽 입구에 아웅산의 동상이 있다. 활달하게 걷는 모습이다. 동상 크기는 그의 보통 키만큼이다. 강렬함은 떨어지나 친근감을 준다. 네피도 왕 동상의 분위기와 다르다. 뙤약볕 아래서 젊은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웅산 유산의 귀환은 미얀마의 밝은 장래를 예고한다. 나의 시각은 굳어진다. “미얀마는 과거의 폐쇄와 억압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역사의 개방은 민주화를 촉진한다.”

자동차 번호판은 미얀마 숫자다. 아라비아 숫자 없는 번호판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고립과 은둔 시절의 잔재다.

 영웅의 귀환에는 우탄트(U Thant·1909~74)도 있다. 60년 한국인의 상식 시험에 나온 인물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누구인가? 버마의 우탄트”. 그 시절 미얀마는 쌀 수출국에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 제3세계 강국이었다. 그는 냉전 속 평화의 중재자였다(총장 재임 1961~71년).

미국과 소련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중재 솜씨는 돋보였다.

 우탄트 묘소는 쉐다곤 파고다 남쪽 문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다. 단층건물 안 가운데에 대리석 묘가 있다. 영정 사진, 왼쪽 벽에는 초상화와 붙어 있다. 추모 안내판이 놓여 있다. 간소하고 조촐하다. 묘소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다.

 그는 사무총장 퇴임 후 뉴욕의 유엔본부 근처에서 살았다. 74년 폐암으로 숨진다. 시신이 양곤으로 옮겨졌다. 네윈은 국장(國葬)을 거부한다. 랑군대 학생들은 정권 타도를 외쳤다. 시위대 수십 명이 숨졌다. 묘소는 감시 구역이 돼버렸다. 네윈은 우탄트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희미하게 했다. 신군부 시절에도 우탄트는 정치적 금기(禁忌)였다. 그곳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추모객(카잉 툰)은 역사 상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대중은 위인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우땅(우탄트 미얀마어 발음)의 위대함이 기억되지 못한 것은 국가적 손실이었다”고 했다.

 지난해 4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우탄트 묘소를 방문, 추모했다. 반 총장(8대)은 우탄트(3대)에 이어 두 번째 아시아 출신이다. 우탄트 역사는 복원되고 있다. 올 4월 초 그가 살던 집이 복구 수리되었다. 올가을에 ‘우탄트 박물관’으로 공개한다. 우탄트의 손자인 탄트 민투우(Thant Myint-U) 박사는 “우리의 복잡한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오늘의 민주화 과정에 필수적”이라고 했다(미얀마 타임스 4월 22일자).
 
양곤의 ‘보족(장군) 아웅산 스타디움’-. 1940년대개장 때 규모와 시설은 동남아 최대였다.
나는 미얀마와 얽힌 또 다른 기억을 찾았다. 양곤 거리의 선전간판 대부분은 삼성·LG, 그리고 미얀마 프로축구가 차지한다. 72, 73년 서울에서 ‘박스컵(박정희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열렸다. 몽몽틴, 몽애몽 등 ‘몽 (마웅·Maung)’자로 시작하는 선수들에게 한국 팀은 고전했다.

 “한국의 김씨처럼 버마에는 몽씨가 많다”는 아나운서의 기발한 해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몽’은 20대 남자의 존칭이다. 미얀마 이름에는 성(姓)이 없다. 이름 앞에 존칭을 붙인다. 젊은 남자는 몽, 나이들고 사회적 지위있는 남자는 우(U), 기혼여성은 도(Daw), 장군은 보족 (Bogyoke)이다.

 ‘보족 아웅산 스타디움’은 미얀마 프로축구(Myanmar National League) 안내판으로 장식됐다. MNL은 2009년 발족했다(현재 12개 팀). 미얀마 사람들은 축구광이다.

 경기장은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 4만 명 수용 규모는 당시 동남아 최대였다. 귀빈석의 나무 칸막이는 금색 도금을 했다. 지금은 색이 바랬고 낡고 좁다. 한국팀을 괴롭혔던 많은 ‘몽’ 선수들의 홈그라운드는 그런 처지다. 미얀마 축구의 부활은 국력의 재기와 같이할 것이다.

미얀마 양곤=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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