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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단장보다 행사요원이 실세…그뒤엔 보위부 요원도 있다

제16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열린 2005년 9월 16일 평양 고려호텔 앞. 서훈 국정원 국장(왼쪽에서 셋째)이 북한 보위부 고위 인사와 신형 벤츠에 오르고 있다. 구형 벤츠(오른쪽 작은 사진)는 당시 남북 수석대표가 이용했던 차량. 북한 회담대표의 격이 막후실세인 보위부 간부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평양=이영종 기자]


당국회담은 남북관계의 기류가 응축된 대결장이다. 웃으며 회담 테이블에 마주앉아 교류와 화해·협력을 말하지만 늘 숨막히는 긴장이 감돈다. 의제와 일정 등 회담 판을 어떻게 짜느냐를 놓고 불꽃 튀는 전초전부터 벌여야 한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싸움은 필수다. 지난 12일 서울에서 열리려던 당국회담도 수석대표(북한은 단장으로 호칭)의 급(級)을 둘러싼 장외 협상이 결렬되면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회담장 보이지 않는 손, 그들은



 남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양측 최고지도자의 의중이다. 회담은 이들 간의 간접대화다. 이번 당국회담 추진 과정에서 남측 대표단의 전략을 지배한 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화두였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의 국장급 수준으로 평가되는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을 두고 ‘장관급’ 단장이라고 한 북한의 주장은 먹혀들 수 없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회담일꾼들을 움직이게 한 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대남 유화 선회전략이었다. 물론 한 단계 낮은 단장을 내보내 심리전 우월감을 누리던 과거의 관행이 먹혀들지 않자 회담 판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회담장의 주인은 사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수석대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회담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회담장에 좀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숨은 실세들은 남북 모두에 있다.



 당국회담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이 열린 지난 9일. 서울 삼청동 회담본부에서 상황을 모니터하던 당국자들은 낯익은 인물을 감지했다. 북한 측 단장인 김성혜 조평통 서기국 부장 뒤로 스치듯 지나간 사람은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전종수였다. 12차에서 21차까지 남북 장관급회담 대표를 지낸 베테랑 대남요원이다. 직급이나 경륜으로 봐도 김성혜보다 상관인 그가 행사요원을 의미하는 ‘보장성원’으로 따라온 것이다. 당국회담 북측 명단에는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이 올랐다. 실무접촉과 본회담 모두 단장은 얼굴마담이었고, 실제로 뒤에서 이들을 움직이고 회담 판을 좌지우지하는 건 전종수와 원동연인 것이다.



 물론 이들 뒤에는 보위부의 감시가 있다. 보위부 요원들은 단장의 수행원이나 기자 등으로 위장한다. 취재는 하지 않고 남측 대표단이나 수행원의 얼굴 촬영에 여념이 없고 처음 나간 사람들의 신원 파악에 몰두하면 영락없는 보위부 소속이다. 또 대부분의 북측 대표단원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을 꺼리는 것과 달리 보위부는 거리낌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의외로 이들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는 경우가 많고 남측과의 언쟁도 피해 매너 좋은 사람들로 분류된다.



 우리의 경우 상대적으로 회담 수석대표의 운신의 폭이 넓은 게 사실이다. 물론 남북 모두 각기 서울과 평양으로부터 훈령을 받아 회담을 치러야 한다. 현장 판단이 어렵거나 돌발사태를 만났을 땐 훈령을 달라는 청훈을 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모두 암호화된 비밀통신으로 이뤄진다. 회담장 어디에나 남북 간 직통전화와 팩스가 가설된다. 신호가 특수한 장비로 암호화돼 있어 중간에 도청을 하려 해도 내용을 알 수 없다. 회담 대표단에 남북 모두 정보기관 소속 통신 전문가가 반드시 포함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평양 회담 때 우리 상황실에는 늘 대중가요가 귀가 따갑게 틀어져 있다. 북측의 도청을 어렵게 만들려는 조치다. 쓰고 남은 A4용지는 물론 쓰레기까지 모두 그대로 남측으로 가져올 정도로 보안은 철저하다. 호텔방에서 대화는 금물이다. TV를 크게 틀어놓거나 샤워기를 열어 도청 시도를 막기도 한다. 메모지는 밑의 3~4장까지도 뜯어서 가져온다. 혹 글씨 자국이 뒷종이에 남아 내용을 추적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회담 상황은 남북 합의에 따라 상대 측에 음성 또는 화상으로 전송해 준다. 이를 지켜보면서 훈령뿐 아니라 이른바 ‘쪽 지시’도 회담장에 날린다. ‘더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라든가 ‘허리를 꼿꼿이 펴라’ ‘잠시 정회를 요청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지침도 떨어진다.



 남측 회담 운영의 막후에는 국가정보원이 있다. 회담 성사를 위한 비밀접촉 단계부터 국정원이 주도하는 데다 정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게 회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모두 임동원·김만복 국정원장이 핵심 역할을 했고, 공동선언문 서명장에 이들이 배석한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적어도 회담장에서만큼은 ‘내곡동’(국정원 본청이 서울 내곡동에 위치)으로 불리는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회담 전략과 운용뿐 아니라 통신·운송·일정 등 모든 상황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 수석대표가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의 상황이나 급작스러운 동선 변경 등은 국정원에게 귀동냥하지 않으면 파악이 어렵다. 교통 통제를 잘못해 북측 대표단의 통행이 지체되자 국정원 통제단장이 현장 경찰 관계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욕설을 퍼붓는 일도 벌어진다.



 국정원 대북전략국장은 회담장의 ‘드러나지 않는 꽃’으로 불린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부터 김보현-서영교-서훈으로 이어진 이들 라인은 막강파워다.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16차 장관급회담 때는 북한 보위부 고위 관계자와 서훈 국장이 고려호텔 앞에서 대표단 전용 차량이 아닌 북측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번 실무접촉 단장으로 나왔던 김성혜는 당시 우리 회담 관계자들에게 “서 국장과 밤새 술을 너무 먹어 힘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이던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서훈 국장의 대북 접촉을 ‘S라인’이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홍 의원은 “회담에 국정원도 개입한다는 걸 저쪽(북)은 너무 잘 알고 있다”며 “큰 방향은 통일부 장관이 협의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S라인에서 내부 조율을 밤샘하며 벌인다”고 말했다.



 서울 회담 때는 다른 국장이 북측 고위 인사와 심야에 택시를 타고 외부로 향하는 상황도 목격됐다. 남북 모두 회담장을 이탈해 대화나 만남을 갖거나 별도의 동선을 갖는다는 건 국정원이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당국회담은 일단 파국을 맞았지만 남북 모두 대화 수요는 꿈틀거린다. 김대중·노무현정부는 물론 이명박정부와도 차별화된 대북 접근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박근혜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가동을 위해 소통이 필요하다. 김정은은 한·미·중의 대북 삼각 압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유화 제스처로 회담 판을 만들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결국 남북 정상회담이란 최종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기싸움을 통해 교감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냉전시기 남북 체제 대결의 주역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과 김일성 주석의 손자 간의 만남이란 상징성을 모를 리 없다. 화해와 소통이란 화두에 의기투합한다면 머지않아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남북회담 막후에서는 이미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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