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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핑계 대지 마 격은 죄가 없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격(格)은 본래 상대를 용납 못하는 습성이 있다. 둘만 되면 싸운다. 격이 둘 모인 한자 ‘격격’은 서로 치고받는 모양새를 일컫는다. 『반금련전』에는 이처럼 격이 맞지 않아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를 격격박박(格格駁駁)이라고 적고 있다. 그 격격박박에 딱 맞는 예가 하나 추가됐다. 엊그제 무산된 남북 당국 회담이다. 장관급이니, 국장급이니 남북이 서로 격 핑계를 대고 판을 깼다. 비난의 화살이 격에 쏠리고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디 격이 비난받을 일인가. 한번 따져보자.



 격은 본래 나무가 자라난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다. 한자의 연원을 따져 놓은 『설문해자』는 ‘격은 목장(格, 木長)’이라고 적고 있다. 이게 조금 지나더니 마차를 연결하는 나무 막대나 네모난 나무틀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나무 막대나 나무틀은 딱딱 맞추는 게 최고의 미덕이다. 안 맞는 걸 억지로 욱여넣으면 어디서든 사달이 난다. 수레가 끊어지거나 바람이 새고 창·문틀이 부서진다. 사람끼리도 마찬가지다. 격이 안 맞으면 다툼이 생긴다. 귀족과 노예, 양반과 상놈을 붙여 놓으면 무슨 탈이 나도 나게 마련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자. 격은 꼭 맞춰야만 하나. 물론 맞추는 게 기본이다. 옛사람들이 오죽 격 맞추기를 중시했으면 ‘엄격’이란 단어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세상 이치가 어디 그런가. 가끔은 격을 안 맞추는 게 정답일 수 있다. 새로운 걸 만들 때 특히 그렇다. 격을 깨지 않고 창조는 없다.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란 말은 너무 오래돼 진부할 정도다. 그래서 파격(破格)이 나왔다. 파격이 뭔가. 피천득은 ‘국민 수필’이 된 수필, ‘수필’에 진작 모범 답안을 적어 놨다. ‘덕수궁 박물관의 청자 연적, 거기에 새겨진 질서 정연한 꽃잎들, 그 질서를 깨고 약간 꼬부라져 있는 꽃잎 하나’, 그게 파격이다. 그는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했다.



 격은 급(級)과 절친이요, 서로 통한다. 동격=동급이다. 이번 협상에서도 남북은 격과 급을 섞어 썼다. 급은 맞출 때가 따로 있다. 스포츠를 보자. 급을 맞추는 건 대개 힘으로 겨루는 경기다. 권투·레슬링·유도 같은 격투기가 그렇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은 아예 싸움이 안 되니 덩치순이 맞다. 반면 기술을 겨룰 때는 다르다. 덩치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골프·야구·축구 같은 구기 종목이 그렇다.



그럼 이번 남북 당국자 회담은 어느 쪽이었나. 힘으로 겨룰 일이었나, 기교로 다룰 일이었나. 남북이 서로 급이 안 맞는다며 판을 깬 걸 보면 답은 자명하다. 속내는 힘겨루기였단 얘기다. 하기야 남이든 북이든 이게 급이나 격 핑계 대고 깰 판이었나. 그러므로 판정컨대, 격은 죄가 없다.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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