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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김성혜, 대남 유화책 메신저인 듯












남북 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열린 9일 오전 9시43분 판문점. 북측 판문각 앞에 검은색 벤츠 E 240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서고 한 여성이 내렸다. 왼편 가슴에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단 청록색 정장에 앞코가 뾰족한 최신 유행의 ‘포인티 토(pointy toes)’ 구두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20㎝ 높이의 군사분계선(MDL) 콘크리트 경계석을 넘어 남측으로 향했다. 김성혜(47)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장. 북한이 실무회담의 단장(남측은 천해성 수석대표)에 40대의 여성 부장을 보낸 것이다.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회담장인 평화의 집에 들어서며 남측 천해성(48·통일부 정책실장) 수석대표 등에게 “반갑습니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회담 테이블에 앉은 천 수석대표가 “더운 날씨에 오시느라 고생 많았다”고 하자 “몇 년 만에 진행되는 회담이니 더운 날씨든, 추운 날씨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맞받았다.

 오전 한 시간의 전체회의에 이어 오후엔 여러 차례의 수석대표 단독 접촉 등 릴레이 협상이 이어졌다. 양측은 12~13일 1박2일 동안 서울에서 장관급회담을 연다는 데 일찌감치 공감대를 이룬 뒤 구체적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대남) 비서의 서울 방문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천 수석대표는 김양건이 본회담 단장으로 와야 ‘장관급’이란 격에 맞는다는 입장을 밀어붙였다. 김성혜 단장은 통전부 산하 조평통 서기국장급이 맡아도 문제가 없다며 맞섰다. 양측은 이 문제로 밤늦게까지 진통을 거듭했다.

2005년 9월 남북 장관급회담장인 평양 고려호텔에서 함께한 김성혜와 이영종 기자.
 북한이 여성을 단장으로 한 3명의 대표단을 내려보내자 남측 회담 관계자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통일부 회담본부 당국자는 “남측에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 걸 염두에 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포석 같다”고 풀이했다. 좀 더 깊은 의도가 깔렸단 분석도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색 국면에서 세련된 외모의 여성 대표가 왔다는 건 우리 국민의 대북감정을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협상 전면에 나섰던 대남통 대부분이 숙청·퇴진했지만 김성혜는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이번에 발탁됐다는 풀이도 있다.

 김성혜는 김일성대 출신의 엘리트 관료다. 김 단장과 기자가 친분을 맺은 건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16차 장관급 회담 때다. 회담장인 고려호텔에 나타난 그녀는 대표가 아닌 ‘보장성원’(행사요원의 북측 표현) 신분이었지만 튀는 행동으로 남측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분홍색 투피스에 최신 유행 핸드백을 들고 나오는 등 파격을 보였기 때문이다. 남측 대표단원은 물론 기자와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눴고, 저녁 자리에 동석해 몇 차례 술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녀가 특별한 출신성분을 가진 실세거나 고위직임을 의미했다.

당시 기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김성혜는 남편이 당 기관지 노동신문에서 일하고 아이 둘을 키우는 주부라고 밝혔다. 어릴 적 ‘2월16일(김정일 생일) 소년단’ 입단행사 때 대표선서를 했었다는 말도 했다. 남들과 다른 집안 배경을 가졌다는 얘기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김성혜는 “그까짓 거 못할 게 뭐 있습니까”라며 선뜻 응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신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당시 함께 방북한 국정원 국장의 이름까지 대며 “밤새 같이 술을 먹어 힘들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일 것이란 관측이 나왔었다. 그러나 이번엔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조평통 부장’ 직함을 달고 나왔다.

 남북 접촉에 관여한 핵심 인사들은 김성혜를 “항상 자신만만했고 남측 인사들에게 잘 대해 줘 실세라는 인상을 준 인물”(전직 통일부 국장)로 기억했다. 김영수 교수는 “2002년 추석 때 방북했는데 김성혜가 안내원으로 나왔다”며 “까칠한 다른 대남요원과 달리 부드럽고 차분한 언행이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회담본부장을 지낸 한 당국자는 “남북 회담장엔 좀체 보기 힘든 원색 계열이나 핑크톤 옷차림에 세련된 헤어스타일 등으로 눈길을 끌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2005년 6월 서울 장관급회담 때는 오전회의와 오찬, 외부 참관과 만찬에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 패션쇼를 방불케 했다”고 기억했다.

 9일 김성혜가 입고 나온 짙은 청록색 정장은 지난해 7월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퍼스트레이디로 데뷔할 때 입은 스커트 색깔과 같다. 스타일리스트 그룹 ‘씬(SCENE)’의 최선임 대표는 “과거 즐겨 들던 클러치백을 커다란 흰색 가방으로 바꿔 들어 회담 대표로서의 실무적 분위기를 연출한 게 눈에 띈다”고 말했다. “발가락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뾰족한 구두를 선택한 건 그녀가 외부세계의 패션 흐름에 맞춰 멋을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이명박 정부 5년간의 회담 공백 속에 그녀가 존재감을 드러낸 건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다. 조문을 위해 방북한 이희호 여사를 영접하는 최고의 예우가 필요한 일을 김성혜가 맡은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그동안 대남통으로 성장한 김성혜를 북한 당국이 본격적으로 회담에 투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만큼 그녀가 12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장관급회담의 북측 대표단원에 포함될 것으로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남측 천해성 수석대표도 본회담 합류가 예상된다. 남남북녀 회담으로 관심을 모은 두 사람의 대결이 서울 장관급회담 테이블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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