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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말기환자도 알 권리가 있다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가족들이 의사에게 당부한다. 환자가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암 진단 사실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가족들은 환자에게 “별거 아니다”라고 둘러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보던 장면이다. 요즘은 암 발병 사실 정도는 알린다. 의료계의 노력에다 약·장비가 좋아지면서 ‘암 공포’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쉬쉬하는 게 있다. 바로 말기 고지(告知)다. 임종 단계가 다가오면 더 쉬쉬한다. 이게 효도이고 아내(남편)의 도리라고 여긴다. 그러다 상태가 악화되면 심폐소생술·인공호흡·강력항생제 등으로 연명의료를 한다. 해마다 3만 명이 현대 장비에 둘러싸여 숨진다.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유보하거나 짧게 받게 한다.



 이 과정 어디에도 환자는 없다. 연명치료를 할지 말지, 어디서 임종할지를 환자가 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2008년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대법원이 연명치료 중단을 판결한 첫 사건)처럼 평소의 환자 생각을 추정할 근거가 있으면 가족이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해도 환자 뜻을 다소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환자의 뜻과 관계없이 마지막 과정이 결정된다.



 말기환자도 알 권리가 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정리할 수 있다. 수필가 허숭실은 2010년 한 심포지엄에서 아버지(75)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소개했다. 그의 선친은 담도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보름간의 여행을 떠났다. 고락을 같이한 동료와 친구를 만나 고마움을 전하고, 같이 사업하다 배신한 사람을 찾아가 위로금을 전했다. 선친은 “마음의 빚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자 학비로 회사 지분을 공증하는 등의 정리작업을 하고 6개월 후에 생을 마감했다.



 암 환자의 95%는 자신의 증상을 알고 싶어 한다(서울대 의대 윤영호 교수 조사). 말기환자의 하루는 보통 사람의 1년보다 더 값지다.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도 배우자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3년 전 일이다. 40세 말기 유방암 환자는 “집에 가자”고 남편에게 보챘다. 집에 가자 환자는 아이들 방을 치우고, 잔소리를 해댔다. 설거지와 청소를 하면서 잠시나마 엄마와 아내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를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았던 거다. 그녀는 일주일 후 병원으로 돌아갔고 곧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말기 상황을 알리지 않았으면 ‘설거지 소망’을 이루지 못했을 게다.



 환자 알 권리 충족의 1차 책임은 의사에게 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닥치기 일쑤다. 의사가 환자에게 정확히 설명하고 심폐소생술·항생제투여 등 연명의료계획(POLST)을 작성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가고 있다. 의사도 소극적이다. 임종 상황은 갑작스레 닥치면 차라리 연명치료를 하는 게 안전하다. 잘못했다가 살인죄에 휘말릴 수 있다. 실제 그런 적도 있다.



 2008년 미국에서 1년 연수생활을 할 때 워싱턴주가 주민투표로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을 도입하는 과정을 볼 기회가 있었다. 태평양 연안 서북부의 오리건주가 1997년 도입한 이래 미국에서 두 번째 시도였다. 당시 미국인 지인들에게 “왜 찬성하느냐”고 물었더니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 그게 당연하지 않으냐”라고 했다. 자기결정권을 내세웠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의식불명 환자를 퇴원시킨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은 사건) 이후 국내에서 연명의료 논란이 이어져 왔다. 관련 법률 제정이 지체되자 건강할 때 연명치료 유보를 미리 정하는 사전의료의향서(AD) 쓰기 운동이 번지고 있다. 작성자가 8000명을 넘었다. 일종의 자기결정권이다. 하지만 민간 운동이라서 법적 대항력이 약하다.



 최근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산하 특위가 연명의료 결정 세부 방안을 내놨다. 연명의료의 대상과 범위, POLST·AD를 활용한 환자 의사 확인과 가족의 대리결정 등을 두루 담았다. 16년간 논쟁의 결실로, 글로벌 스탠더드(국제기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 안이 하루빨리 법제화돼야 한다. 말기환자의 알 권리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법률에 의사의 설명을 의무화하거나 적극 권장하는 조항을 넣는 것도 방법이다.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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