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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삼성으로는 퍼스트 무버 되기 힘들다"

손병두 한국선진화포럼 회장(왼쪽)은 “자만을 경계하고 서번트 리더십을 갖출 것”을 주문했다. 김기원 방통대 교수(오른쪽)는 “국민의 존경 받으려면 특권 의식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매출 29조원(1993년)→380조원(2012년), 세전이익 8000억원→ 38조원, 시가총액 7조6000억원→338조원.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주창한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삼성이 일궈낸 성과다. 20년 전 그의 일성은 변방의 이름 없는 회사에서 애플도 긴장하는 글로벌 정보기술(IT) 최강자로 우뚝 선 삼성 도약의 시발점이 됐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1993년 6월 7일)’ 20주년을 맞아 30여 년간 자유시장경제를 설파해 온 경제인과 비판적 시각으로 국내 대기업을 연구해 온 진보 경제학자가 5일 만나 그 의미를 되짚어봤다. 손병두(72·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선진화포럼 회장과 김기원(60)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다.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2시간가량 진행된 좌담에서 두 패널은 삼성과 한국 대기업을 위한 격려와 조언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신경영 20주년과 미래의 길
보수?진보 경제 전문가 대담



사회=표재용 산업데스크



손병두 한국선진화포럼 회장



-1941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 한양대 경영학 박사, 전경련 상근부회장, 서강대 총장 역임

-저서 : 『경제상식의 허와 실』 『시민이 고객 되는 지방경영』 『뉴밀레니엄 생존전략 - IMF 파고를 넘고』 등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1953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 석사·박사, 논문 : ‘재벌개혁 반대론 비판’ 등

-저서 : 『미 군정기의 경제구조』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생활 속의 경제』 등



표재용: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올해로 20년째를 맞았다. 신경영 선언이 한국 기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손병두: 이런 선언이 왜 나왔는지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세계적 기업인으로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GE의 잭 웰치 등을 꼽는다. 경영자 이건희는 그 반열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1등’이 돼야 만족하는 이 회장의 집요함과 집중력이 삼성 변화의 원동력이 됐다.



 김기원: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을 세계 경제의 대세인 글로벌화와 정보통신화에 잘 적응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국내 최고 그룹을 세계적 그룹으로 도약시켰다. 다만 신경영 선언 이후 진출한 자동차 사업 등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아쉽다.



 표: 당시 신경영 선언은 삼성 임직원에게 던진 메시지였지만 다른 국내 기업들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김: 한국 경제가 ‘추격 성장’의 단계에서 ‘선도적 성장’으로, 프런트 러너(Front Runner)로 변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삶의 질은 별도로 따지더라도 한국이 국내총생산(GDP)과 산업구조 면에서 선진국에 올라선 계기가 됐다.



 손: 삼성은 국내 기업들과도 경쟁하고 있다. 변하지 않거나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삼성의 경쟁사들은 삼성의 변화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삼성의 선도적 움직임은 국내 기업들이 함께 발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표: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할 당시인 1990년대 초반, 국내 기업들엔 어떤 고민이 있었나. 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나.



1995년 3월 삼성 구미공장에서 임직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불량 판정을 받은 휴대전화 15만 대를 폐기하는 ‘화형식’이 열렸다(사진 위).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이듬해인 94년에 작성된 삼성의 연차 보고서(annual report) 표지. 삼성 내 계열사를 상징하는 모자들의 좌측 맨 위에 ‘혁신’이라고 쓰인 것이 눈길을 끈다. [사진 삼성]
 김: 삼성 등 우리 대기업의 변화는 87년 정치민주화와 97년의 IMF 외환위기, 이 두 개의 큰 역사적 계기와 관련해 봐야 한다. 87년 정치민주화로 노동계 요구가 강해졌고 기업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까가 숙제가 됐다. 또 하나는 97년 외환위기 전에는 규모의 경제, 양적 확대를 추구했는데 경제위기가 오면서 이른바 ‘대마불사’ 원칙이 깨졌고 수익성을 중시하는 질적 변모로 발전하게 됐다. 이런 큰 흐름에서 삼성은 한발 앞서 적응한 덕에 발군의 지위를 확보했다.



 손: 당시 한국 기업들은 줄곧 일본을 벤치마킹해 왔는데 일본의 침체가 시작됐다. 일본에서 배울 게 없어지면서 이제 어떻게 변신해야 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안 가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러자 한국 기업은 부채가 많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과 경영자의 행동부터 조직관리까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외환위기 이후 다른 기업들이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삼성이 성장한 것은,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통해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축된 힘이 외환위기 때 위력을 발휘했다. 신상필벌이 아닌 ‘신상필상’처럼 관리체제와 의식구조를 바꾼 것, 조직에 개방성과 유연성을 더한 것이 위기 때 도약하는 힘이 됐다



 김: 기업 구조조정 측면에선 외환위기를 통해 도약했지만 이 모든 게 신경영 선언 하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사실 다른 기업보다 앞선 삼성의 조직 문화는 선대 이병철 회장, 이건희 회장, 임직원들의 능력 등이 모두 합쳐져 만들어진 합작품이다. 다만 언급한 대로 이후 여러 가지 무리한 사업을 벌인 점 등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표: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행동으로 잘 옮긴 덕에 이제 삼성은 애플과 맞대결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을 바꿀 만한 혁신적인 선도 기업인지, 아직 의견이 갈린다.



 김: ‘날쌘 추격자’에서 ‘앞선 개척자’로 도약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앞선 개척자로 나가려면 교육을 포함한 한국사회 전반이 도약해야 하는 문제라서 삼성에만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사실 삼성이 성공해 온 요인 중 하나는 한국 재벌 중에서 가장 덜 재벌적이었다는 데 있다. 경영학 용어 중 ‘경영 위계제(Managerial Hierarchy)’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삼성이 이게 가장 발달돼 있다. 전문경영인에 대한 권한 이임이 잘돼 있다는 의미다. 조직의 삼성,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관리’가 날쌘 추격에서는 의미를 가지나 개척자의 영역에서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창의적 사고가 꽃피는 상황이 되려면 ‘관리’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 직원 평가 같은 데서 삼성은 아직 단기 성과 중심이다. 장기적 연구를 해야 혁신이 이뤄지고 퍼스트 무버로 갈 수 있다. 경영의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손: ‘빠른 추격자(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버리고 무작정 ‘선도자(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정답은 아니다. 오히려 양 날개로 가야 한다. 지금도 삼성이 따라가야 할 기업이 많다. 한쪽으로는 추격하면서 다른 날개로는 퍼스트 무버로 가야 한다. 작은 나라, 작은 시장에서 태어나 강한 외국 기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하겠나. 시골에서 골목대장과 싸움이 붙으면 결국 형제 많은 집이 이긴다. 한국 기업은 단품 하나로 세계를 뚫기 어렵다.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춰야 시너지를 갖고 해외 공략도 가능하다.



 표: 2000년대 이후 삼성이 5대 신수종 사업을 정해 미래 먹거리 발굴에 나섰지만 아직 눈에 잡히는 성과는 없다. 삼성을 포함해 국내 대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김: 삼성의 신수종 사업과 관련해 조언하자면 지정학적 특수성을 감안해 대북 사업을 삼성이 주도해 주길 바란다. 앞서 몇몇 대기업이 시도하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만큼 삼성이 성공시키면 역사에 길이 남는 기업이 될 것이다. 둘째는 협력업체, 노사관계, 사회 유력층과의 관계에서 삼성이 모범을 보이면 좋겠다. 그러면 삼성도, 우리 사회도 질적으로 도약한다.



 손: 현재 삼성의 인력과 기술은 장담컨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형상으로도 국내 9만 명, 해외 14만5000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회사다. 그럼에도 ‘기업문화’ 측면에선 바꿔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특히 여전한 ‘순혈주의’가 가장 큰 문제다. 어렵게 해외 등 외부에서 ‘수퍼(S)급’ 인재를 데려왔는데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떠나게 해선 안 된다. 폐쇄성, 배타성을 깨지 못하면 진정한 일류로 못 간다. 개인 창의가 존중되는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키느냐가 핵심이다. 둘째, 성공신화에 절대 자만해선 안 된다. ‘우리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식의 자만의 덫에 빠진 기업들이 바로 삼성에 역전당한 기업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기업에 가장 필요한 게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다. 국민과 종업원을 섬기면서 이끄는 리더십을 확립하면 기업을 보는 국민의 눈이 확 달라질 것이다.



 표: 대다수 국내 기업의 경영은 눈에 띄게 선진화됐다. 해외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고용창출에도 기여한다. 그런데도 대기업을 보는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불편함이 있는 게 현실이다.



 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엄청난 영향력 탓에) 대기업이 되레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닌가 우려하는 것이다. 좌파 진영에서 재벌 개혁이라는 용어를 쓰면 이를 ‘재벌 죽이기’로 오해하는데 그게 아니라 ‘재벌 거듭나기’다. 선진적 대그룹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야 하고 돕기 위해선 채찍과 당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특권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랑스러운 기업이 되도록 돕자는 게 진정한 재벌 개혁의 목표다.



 손: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성이 좋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한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매년 350억원씩 쓰고 있다. 문제아가 삼성꿈장학회의 장학금으로 학생회장이 되고 하는 기적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에게 따뜻한 사랑을 못 받는 것은 소통의 문제, 양극화 현상 등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정부·기업·근로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정부가 기업을 속죄양 삼지 말아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외롭게 투쟁한다. 기업을 규제 대상, 정치적 이익의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기업을 지원해 국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하는 국민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을 자극해 대기업 때리기에 나서면 결과적으로 일자리 창출, 국부 창출이 안 되고 결국 국가 손해다.



정리=박태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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