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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3> 선전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천당은 왼쪽, 선전은 오른쪽(天堂向左, 深往右)』. 부를 쫓아 선전시로 몰려든 중국 젊은이의 야망과 분투, 냉혹한 현실을 다룬 소설이다. 인기 덕에 지난해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제목처럼 선전에는 천당과 지옥이 공존한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도시경쟁력 순위에서 선전을 홍콩 다음가는 중국 제2의 도시로 뽑았다. 다음은 젊은 도시 선전의 이야기다. 



33년 만에 GDP 7234배 증가 … 중국식 초고속 경제발전의 상징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시진핑이 선전으로 간 이유는



12월 8일 선전(深)시를 시찰 중인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가 롄화산(蓮花山) 공원에 세워진 덩샤오핑(鄧小平) 동상에 헌화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사진 뒤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건의로 1979년 경제특구로 지정된 도심의 마천루가 보인다. 중국 서북 토박이였던 시중쉰은 89년 은퇴 후 선전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으로 선전시 발전에 힘을 보탰다. [선전 신화=뉴시스]


2008년 7월과 2012년 12월 각각 국가부주석과 당 총서기에 취임한 시진핑(習近平)이 선전을 방문했다. 첫 지방 시찰이었다. 그가 수많은 도시 가운데 선전으로 먼저 간 이유는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영향이 컸다. 시중쉰은 1978년 문화대혁명 때 당한 박해에서 복권돼 광둥(廣東)성 서기에 취임했다. 그는 첫 시찰지로 바오안(寶安·현재의 선전)을 찾았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인 셈이다. 선전은 시진핑 부자와 인연이 깊다. 78년 시찰 때 시중쉰은 바오안현의 사터우자오(沙頭角)·뤄팡(羅芳)·뤄후(羅湖)·황강(皇崗)·수이웨이(水圍)·위눙춘(漁農村) ·서커우(蛇口) 등을 두루 살폈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모두 특구로 변신했다. 당시 바오안은 홍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탈주현장을 목격한 시중쉰은 만감이 교차했다. 수용소 탈주자에게 물었다. “왜 남의 종 노릇하고 착취당하는 홍콩으로 도망치려 하는가?” 탈주자가 솔직히 대답했다. “우린 가난합니다. 배급이 적습니다. 홍콩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쉽습니다.”



 1년 뒤 시중쉰이 이미 시로 승격한 선전시를 다시 찾았다. 홍콩 밀입국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표본겸치(標本兼治)’. 문제의 겉(標)과 속(本)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식이다. 우선 대증요법으로 탈주자를 적발해 처벌했다. 이와 함께 대외 개방과 민생 개선을 병행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다. 홍콩과 격차를 줄여 탈출 동기를 없애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시중쉰은 국무원(중앙정부)에 선전을 경제특구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시중쉰에게 “(선전을) 특구라고 부르자. 과거 산간닝(陝甘寧, 산시·간쑤·닝샤) 소비에트도 특구였다. 단 지금 중앙에 돈이 없다. 자네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혈로를 뚫어라”고 말했다. 마카오와 맞닿은 주하이(珠海), 대만과 마주한 샤먼(廈門), 산터우(汕頭)와 함께 선전이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선전특구의 기획자는 시중쉰이었다. 덩샤오핑은 후원자에 불과했다.



 시중쉰은 80년 전인대 상무부위원장에 뽑혀 베이징(北京)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에도 87년 2월, 88년 12월, 89년 12월 등 수차례 선전을 찾았다. 방문할 때마다 그는 “개혁은 어렵고 힘든 임무다. 실수가 없을 수 없지만 개혁은 확고해야 한다. 제자리걸음도, 되돌아가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중쉰은 인생 전반은 북방의 토양이 키웠고, 후반 인생은 남방의 토양이 키웠다고 번번이 말했다. 은퇴한 89년부터 2002년 숨질 때까지 선전에서 말년을 보냈다. 부인 치신(齊心)과 선전영빈관 별장 5동인 ‘란위안(蘭園)’에서 지냈다. 선전에 시찰 온 중앙 지도자들은 모두 시중쉰을 찾았다. 시중쉰은 이때마다 “선전은 샤오핑 동지가 씨앗을 심은 실험구다. 지금 싹이 자라 살찌고 튼튼하다. 이 길이 옳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2005년 9월 저장(浙江)성 서기였던 시진핑이 선전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과거 푸젠(福建)성에서 근무할 때 선전을 여러 번 방문했다. 선전의 경험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시진핑에게 선전은 정책의 샘터였다.



 지난해 12월 7일 선전을 시찰한 시진핑은 롄화산(蓮花山)의 덩샤오핑 동상에 참배했다. 때마침 2012년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20주년이었다. 확고히 경제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튿날 공식 일정을 마친 시진핑은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하버드대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딸 시밍쩌(習明澤)와 함께 란위안의 노모를 찾았다. 총서기 취임 후 처음으로 단란한 가족 시간을 가졌다는 후문이다.



2 시중쉰과 시진핑 부부, 딸 시밍쩌(習明澤)가 선전의 한 공원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3 시중쉰·시진핑 부자는 선전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선전 신화=뉴시스]
● 선전속도  79년 1억7900만 위안(약 329억원)이던 선전의 국내총생산(GDP)은 2012년 1조2950억 위안(약 238조원)으로 증가했다. 33년 만에 7234배 증가한 수치다. 2007년 중국 최초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지난해엔 2만 달러를 돌파했다. 한국이 2만 달러 고지를 넘은 것은 2011년. 불과 1년 차이다. 선전시 인구는 1054만 명. 한국 인구의 약 5분의 1인 선전시가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선전속도’라는 신조어가 있다. 82년 11월부터 85년 12월까지 37개월 만에 완공한 선전시 국제무역센터에서 나왔다. 무역센터는 160m, 53층으로 당시 중국 최고 건물이었다. 84년 선전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국제무역센터가 사흘에 한 층씩 올라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덩은 흡족해했다. 다시 방문해 꼭 올라 보겠다고 말했다. 92년 88세의 덩샤오핑이 다시 선전을 찾았다. 그는 국제무역센터 전망대에 올라 개혁·개방을 외쳤다. 유명한 남순강화다. 53층 회전식 식당의 이름이 ‘덩궁팅(鄧公廳)’인 이유다. 비싼 가격에도 ‘덩궁팅’의 예약 행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당시 덩샤오핑의 일거수일투족은 3월 26일자 ‘선전특구보’에 1면 톱기사로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동방풍래만안춘(東方風來滿眼春)’. 동쪽(홍콩)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눈에 봄이 가득하다는 옛 시에서 인용했다.



 선전은 신화의 도시다. 90년대에는 383m의 디왕(地王)빌딩이 ‘신선전속도’로 건설됐다. 아흐레에 4층씩 올라갔다. 선전속도는 중국식 발전신화의 증거다. “시간은 돈, 효율은 생명”이라는 표어가 뱀의 입이라는 의미의 서커우 공업구 대로에 여전히 붙어 있다. 선전속도는 현재진행형이다.



● 첨단기업의 요람   선전은 기업을 세워 경제혈로를 뚫었다. 기업 특혜정책이 쏟아졌다. 젊은 모험가들이 창업물결로 화답했다. ‘삼성 추격자’ 화웨이(華爲)도 그중 하나다. 화웨이는 현재 에릭슨에 이은 세계 2위 통신장비 제조사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삼성·애플에 이은 3위로 추격해 왔다. 군 출신의 런정페이(任正非·69)가 88년 초기 자본금 2만 위안(약 370만원)으로 선전에서 설립했다. 지난해 매출 2202억 위안(약 36조3000억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선전시는 증치세(부가세)를 반환해 주고, 선전시장과 부시장이 화웨이 특별팀의 책임자를 맡는 방식으로 화웨이를 키웠다. 선전은 시정부가 기업을 위한 서비스 조직을 만든 최초의 도시다. 기업 친화도시 선전은 수많은 옥동자를 낳았다.



 화웨이에 이어 중국 2위의 통신장비업체인 중싱(中興· ZTE), 세계적 전기차 제조업체인 비야디(比亞迪·BYD), 중국 최대의 TV 생산업체인 TCL, 중국의 인기 포털 텅쉰(騰訊·Tencent)의 본거지가 모두 선전이다.



● 책 읽는 도시  크리스마스는 선전의 최고 명절이다. 젊은 시민들이 성탄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신 춘절(春節·설날)이 되면 선전은 유령도시로 변한다. 토박이 없는 이민 도시여서다. 선전시민은 대부분 외지인이다. 이 때문에 문화학자 이중톈(易中天)은 “선전은 중국에서 사투리가 없는 유일한 도시”라고 『독성기(讀城記)』에서 지적했다. 사투리 없는 푸퉁화(普通話) 도시 선전의 특징은 개방과 수용이다. 개방과 수용성은 시민들을 독서광으로 만들었다.



 96년 11월 선전에서 제7차 전국 북페어(도서전)가 열렸다. 이전까지 북페어는 출판사들이 반품을 처분하는 행사에 불과했다. 선전에선 달랐다. 개막 당일 5위안(약 800원)의 입장료에도 10만 명이 넘게 입장했다. 10일 동안 ‘선전수청(深書城)’ 한 서점 매출액만 2177만 위안(약 40억원)을 넘었다. 이에 정부가 나섰다. 2000년부터 매년 11월을 ‘독서의 달’로 정했다. ‘독서·진보·조화’를 모토로 한 축제를 열었고, 선전은 학습형 도시로 재정비됐다.



 선전은 평균 도서 구매량, 도서관 이용률이 전국 최고다. 선전의 베스트셀러에는 실용서가 많다. 허춘화(何春華) 선전출판그룹 부사장은 “선전은 이민 도시여서 평균 연령이 낮고 지식계층이 많아 지식 욕구가 강하다. 인재 시장이 발달해 경쟁이 심하고 이 때문에 독서 인구가 많다”고 설명한다. 왕징성(王京生) 선전시 선전부장은 ‘중국청년보’ 인터뷰에서 “선전시는 창출한 물질적 재부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독서열로도 존중받을 만하다”며 “한 도시의 미래 발전은 그 역사·건축·재부뿐만 아니라 문화와 시민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독서열이 선전의 미래를 밝힌다는 말이다.



● 김정일 대취한 기린산장  2006년 1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는 멀리 선전을 찾아 중국 ‘개혁·개방의 성지(聖地)’를 둘러봤다. 당시 선전시 리훙중(李鴻忠) 서기와 쉬쭝헝(許宗衡) 시장은 김정일 일행을 난산(南山)구 시리(西麗) 호수변에 위치한 기린산장으로 초청했다. 호스트였던 쉬쭝헝은 첫 잔으로 마오타이주 세 잔을 단번에 마시며 이웃 손님을 환영했다. 술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김정일은 호탕한 쉬쭝헝을 칭찬했다. 둘은 “술은 지기를 만나 마시면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酒逢知己千杯少)”며 마오타이를 연거푸 비웠다. 주량이 보통이 아닌 쉬쭝헝조차 이날은 마신 술을 게우면서까지 대작했다는 후문이다.



 다음 날 선전을 떠나는 열차 플랫폼에서 김 위원장이 사람을 찾았다. 중국 측 인사가 김 위원장이 ‘술친구’를 찾고 있음을 눈치채고 뒤에 있던 쉬쭝헝을 앞으로 내세워 김정일과 악수를 나누게 했다. 김정일은 쉬쭝헝과 악수하며 “언제라도 평양에 오면 다시 한 번 거나하게 마셔 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3년 뒤 쉬쭝헝은 부패 혐의로 낙마했다. 5년 뒤에는 김정일도 세상을 떴다. 기린산장의 대작(對酌)은 평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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