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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귀천 뛰어넘어 줄풍류 함께 즐기고 전문 예인들이 등장

1 『악학궤범』 향부악기도설의 향비파와 당비파.
18세기 조선의 음악은 줄풍류·영산회상·가곡 등을 통해 이전 시대와 비할 수 없는 양적·질적 증가를 보인다. 그만큼 풍요롭고 다채로운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 ‘18세기 음악’이라는 제하의 강연에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송지원 교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두 음악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중앙SUNDAY·아트센터 나비 공동 기획 ‘향연’ <4> 18세기 조선의 음악

첫 번째 현장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의 별장 유춘오(留春瑦)에서 벌어진 악회다. 악회 참석자들은 담헌의 친구들. 홍대용은 가야금을, 홍경성은 거문고를, 이한진은 퉁소를, 김억은 양금을, 장악원 악공인 보안은 생황을 연주했다. 명문가인 안동 김씨 출신의 김용겸은 이날 연주에 감탄해 큰절을 할 정도였다.
 
참석한 지식인들은 음악 이론뿐 아니라 다양한 실기에도 능했다. 실학자 홍대용은 혼천의(渾天儀)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18세기의 대표적인 르네상스적 인물답게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765년 숙부인 홍억의 중국 방문에 동행할 때도 그는 거문고를 가져간다. 당시의 교통 및 제반 상황을 감안하면 유난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외국인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음악적 소통의 국제적 가능성을 스스로 가늠해보는 행위였다.

2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전 3폭) 중 <월야선유> (국립중앙박물관)
음악은 시ㆍ서ㆍ화ㆍ악 교양 중 하나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몇 번 설명을 듣고 중국 천주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우리 가락을 연주하기도 한다. 후에 중국에서 들여온 악기 양금의 연주법을 정리해 우리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양금은 크게 유행했다.
 
원래 유교 문화에서는 ‘시서화악’이라 하여 음악은 선비들의 중요 교양 과목 중 하나였다. 악기 연주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잡념을 물리치는 수양의 일종이었다. 기예를 연마하여 솜씨를 뽐내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춘오악회에 모여든 사람들처럼 진실로 음악에 심취한 매니어들이 생겨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합주가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대부들이 등장한다. 이 같은 사대부 문인들은 스스로 연주하고 스스로 감상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만들어 나갔다. 연시 짓기, 공동 그림 감상, 공동 음악 감상 같은 집단 문화활동이 연주회로 이어졌다. 이런 행위는 진정한 ‘음악으로 소통하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줄풍류다. 줄풍류란 거문고를 중심으로 가야금·양금·생황·해금·퉁소 등 다양한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행위다. 음악 애호가들끼리 모인 줄풍류의 현장은 기존의 신분제를 뛰어넘는 파격의 문화현장이기도 했다. 유춘오악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김억은 중인 출신이고, 장악원 악공 보안은 천민 출신이었다. 이들의 교류는 교불택인(交不擇人: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귐)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신분보다 실력의 출중함을 존중했다.
 
모임 구성원들이 개방적이었듯, 음악도 개방적이었다. 줄풍류 영산회상은 거문고 독주뿐 아니라 이중주ㆍ합주 등 그때그때 함께 할 수 있는 악기의 어떤 조합으로도 연주가 가능한 열린 구조의 음악이다. 송 교수는 “영산회상은 태극처럼 순환하는 우주의 기운이 흐르는 음악으로, 거문고 독주를 들으면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평한다.
 
서울의 유행은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향제줄풍류는 20세기 초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구례향제줄풍류ㆍ 익산향제줄풍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두 번째 현장은 평안감사 회갑연이다. 기록화만 보아도 대단한 잔치였다. 대동강 변과 평양성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횃불을 들고 밤을 밝히고 있다. 평안감사와 주객들이 탄 배, 기녀들이 탄 배, 악공들이 탄 배, 축하객들이 탄 배 등 배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며 화려한 선상파티가 한창이다. 이때 어디선가 청포 차일에 담황색 주렴을 드리운 배가 한 척 등장했다. 초대받지 않은 배다. 여기서도 노래와 춤이 시작되었다.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서 평안감사가 그 배를 끌어오라고 명한다. 배에는 학창의에 백우선을 들고 마치 신선 같은 모습의 심용이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평안감사의 오랜 지기로 친구를 위한 서프라이즈 쇼를 했던 것이다. 이때 심용과 함께 내려간 사람들은 여성음악가 계섬, 가객 이세춘, 금객 김철성, 기생 추월과 매월 등 서울 최고의 예인들이었다. 평안감사는 이에 크게 후사하고 예우했다고 한다.

3 김홍도, <포의풍류도>(개인소장)
재력가 후원 덕에 집 한 채 출연료도
이 장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에게 주목해보자. 한때 합천 군수를 지냈던 재력가 심용(1711~1788)은 풍류를 좋아해, 음악인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늘 그의 집안에 모여들었다. 이 시대는 심용뿐 아니라 이정보, 서상수 같은 음악 애호가들이 등장해 음악가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대였다. 당시 음악가들은 대부분 낮은 신분이거나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18세기에는 사회 전체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예술 전반의 향유층이 두꺼워지면서 후원자들이 등장했고, 유명세를 떨치는 전문 예인들이 등장했다. 실제로 음악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음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도 가능해져 출연료로 집 한 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지식인들이 유우춘ㆍ김성기ㆍ계섬 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예술세계에 대한 공감과 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긴 시대이기도 했다. 계섬의 노래에 관해 심노숭은 “노래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라고 그 예술성을 높이 샀다.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우리 음악가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국음악사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해온 송지원 교수는 우리의 정보 비대칭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한다. 알고 있는 서양 음악가를 꼽으라면 못해도 10명 이상은 대충 꼽을 텐데, 부끄럽게도 한국 음악가는 다섯 명도 못 꼽는 것이 지금 우리의 교양 풍토다. 심지어 애견을 위해 작곡을 한 작곡가도 있을 정도로 조상의 음악 행위는 풍요롭고 다채로웠다고 한다. 우리의 무지는 한국 음악가가 없어서가 아니라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런 시대를 산 후유증”이라고 송 교수는 지적한다. 그의 저서 『한국음악의 거장』은 묻혀있던 한국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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