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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야나기 무네요시’전

1921년 5월 ‘조선민족미술전람회’ 전시장에 선 야나기 무네요시. 그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식민지로 내려다본 사람이었을까.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다음달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야나기 무네요시’전은 논쟁적인 전시는 아니지만, 세간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 모습이다. 섬세하게 준비한 자리임에도, 역사적 평가를 분명히 밝혀놓지 않았다며 ‘미술관의 책임 방기’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왜 그럴까.

조선의 예술품 수집·분석
공예운동 관점에서 재해석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 공예운동가다. 그는 일제강점기 아무도 주목하지 않다시피 하던 조선의 공예품을 열심히 수집했고, 분석했고, 글을 썼고, 그 때문에 전후 한국사회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정치적 분석을 배제하고 그를 조망하면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 되고, 정치적 분석에 무게를 두면 조선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식민지’라는 타자로 바라봄으로써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일조한 동양주의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어느 쪽 얼굴이 진실일까.



 이번 전시에 그의 진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야나기가 조선의 공예와 미술에 관심을 기울인 목적이나 동기는 식민 지배를 강화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조선의 문화를 짝사랑했던 탓도 아니었다.



 양차대전 사이 그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경도돼 있었고, 실제로 미술공예운동의 주역이었던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1887~1979)와 밀접히 교유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은 고대 켈트의 전통을 재발견해 그 미감을 현대사회에서 되살림으로써 중세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양문화에 심취했던 야나기에게 조선의 공예는 켈트의 그것처럼 대안의 단초를 제공하는 원시적 과거로 보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시각은 다분히 낭만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야나기는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현대적 미술공예운동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민중의 전통에 주목했다. 그 대상은 조선의 미술과 공예를 비롯해 일본 각지의 민예, 옛 류큐 왕국, 아이누족, 오키나와, 대만의 민속 공예 등 다종다양했다.



 일본 민예관의 현대적 면면을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사랑이 일본식 미술공예운동에 박차를 가하려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 야나기 소리(柳宗理)는 민예관장으로 봉직하다 2011년 별세했다.



 부친의 유업을 이어 산업디자이너로서 큰 업적을 세운 그의 사후 민예관장으로 선임된 인물은 일본의 현대디자인계를 대표하는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다. 후카사와의 ‘수퍼 노멀’은 일상적 사물과 제품에서 20세기 굿 디자인에 버금가는 미덕을 찾아 따르자는 실천사상으로, 야나기의 정신을 그대로 빼닮았다. 성인 4000원, 덕수궁 입장료 1000원 별도. 02-2188-6169.



임근준(미술·디자인 평론가)





★★★★ (임근준 ) 간접화법을 구사하는 세련된 전시 연출,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않은 학예실의 뚝심이 고맙다.



★★★★☆ (최열 미술평론가) 굉장히 멋진 사건이다, 그가 국립미술관에 입성한 일은. 그런데 어둡다. 근대의 고상함이 아니라 현대의 쾌활함을 부여하는 공간연출을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입했어야 했을 듯.



★★★☆ (권근영 기자) 100년 전 조선 민예를 ‘발견’한 야나기의 시선이 불편한 것은 한세기 지나도록 여전한 논란에 휩싸여 있는 우리의 처지가 겹쳐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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