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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건망증 심해 조기 치매 의심된다는 49세 주부



Q 49세 주부입니다. 일찍 결혼한 덕분에 두 자녀 모두 대학에 진학해 이제부터는 나를 위한 삶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조기치매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엉망이 된 기억력입니다.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오래된 친구의 이름이 기억 안 나 무안했던 경험은 기본이고, 얼마 전에는 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백화점에 장 보러 갔다가 더운 날씨에 땀 뻘뻘 흘리며 겨우 택시 잡아타고 집에 돌아 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시 나갈 일이 있어 지하 주차장에 내려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가 없는 거예요. 도난당했나 덜컥 겁이 나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니 그제서야 백화점에 멀쩡한 내 차를 놔두고 택시 타고 온 게 기억 나는 거예요. 큰 이모가 치매를 앓고 계셔서 더 걱정이 됩니다. 정말 조기 치매인가요.



"돌아서면 깜빡? 치매 아니랍니다, 건망증이에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A 조기 치매는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건망증이 심해 치매가 아닌가 생각하는 걸 ‘주관적 기억력 감퇴’라고 합니다. 주관적 기억력 감퇴는 있지만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이 이상한 점을 못 느끼면 치매는 아닙니다. 그냥 건망증입니다. 정말 치매에 걸리면 오히려 본인 증상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멀쩡한데 왜 병원 데려와서 치매 검사를 받게 해”라며 역정을 냅니다. 단순 건망증을 두고 치매에 걸린 게 아닌가 염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꾸로 기억력이 떨어진 걸 아닌 척 숨겨서 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본인 증상은 본인이 더 잘 안다며 “내 딸이 의사예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시 묻죠. “무슨 과 선생님이세요.?”그럼 “음, 그게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기억을 못하겠는데…”라고 대답합니다.



 나이가 들면 서글프게 누구나 기억력이 조금씩은 떨어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도 자기들끼리 모여 치매 걱정을 한다는군요. 건망증은 감성 에너지가 소진되면 나타나는 뇌 피로 증상, 번아웃 증후군 (burnout syndrome)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뇌(이성)를 스마트폰에 비유하자면 스마트폰 본체에 해당합니다. 스마트폰이 점점 똑똑해지는 것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이성 시스템은 과거 우리 조상들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담고 있고 더 빠르게 운영되고 있죠. 이성이 본체라면 감성 시스템은 스마트폰의 배터리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본체가 최신형이고 우수해도 배터리가 번아웃(소진)돼 버리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깜빡깜빡 하는 거죠.



 감성 에너지가 번아웃되어 나타나는 건망증은 지인 이름을 생각나지 않게 만들고 백화점에 차 가지고 간 것도 잊게 하는 해프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웃고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내 뇌가 지쳐서 그래, 치매 아니야’라며 안심시켜 주면 됩니다. 정말 문제는 사람 이름이나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오늘 하루 보낸 삶의 의미와 가치가 기억되지 않고 날아가 버리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저도 건망증이 심합니다. 멀쩡하게 자주 쓰는 약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진료를 보다 말고 몰래 인터넷으로 이름을 검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예 뻔뻔하게 환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실력 없다 불안해 할 줄 알았더니 “주치의까지 깜빡 한다니 오히려 위안이 된다”며 웃으며 돌아갑니다. 약 이름은 까먹더라도 내 삶의 가치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의미치료이론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힘을 갖는 것은 그가 직접 겪은 고초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여러 해 고생했습니다. 매일 아침 남녀가 섞여 발가벗겨진 채 일렬로 세워져 신체 검사를 받고 검시관 손가락 하나에 가스실에 끌려가 싸늘한 시체가 되는 사람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다음날 생사를 모르는 극도의 불안과 인간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수 년씩이나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프랭클 박사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이런 환경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걸 발견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삶의 목적과 가치를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다시 말해 내 삶의 의미를 잊는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욕망에 대한 좌절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의 가치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 상식으론 하루하루 집중해서 열심히 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프랭클 박사의 의미치료이론에서는 거꾸로 이야기합니다. 삶의 가치를 잘 느끼기 위한 테크닉으로 역설적 의도(paradoxical attention)를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너무 열심히 살면 오히려 삶의 가치를 잘 느낄 수 없다는 것이죠. 바쁜 삶과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해야 삶의 가치가 오히려 잘 느껴지고 기억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삶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뜁니다. 그런데 성취를 하는 것과 성취를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여기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노력해 수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그걸 음미하고 즐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덜 성취했지만 잘 즐기는 사람보다 삶이 불쌍한 게 아닐까요. 자본주의상에서의 서열은 높은 데 마음은 가난한 것과 같습니다.



 성취를 위해 달려갈 때는 전투 시스템이 풀 가동되면서 생존에 집중하게 됩니다. 불안한 마음은 전투 시스템이 작동 중이라는 증거입니다. 주변의 위기 상황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삶의 가치에 집중할 때는 이완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게 소중한 것에 대해 몰입하게 됩니다. 거리두기란 주변을 경계하는 불안한 마음을 나에 대한 몰입으로 바꾸는 기술입니다.



 현대인은 진화 과정상 거리두기를 잘 못하는 사람만 살아남은 셈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몰입하고 즐기고만 있으면 옆에서 달려오는 코뿔소에 받혀 생명을 잃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몰입보단 불안-생존 시스템의 가동에 능숙한 사람의 후예가 우리들인 셈이죠.



 그러나 생존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닌 만큼 우리는 삶의 가치에 좀 더 몰입해야 합니다. 몰입은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몰입은 지금 현재에 대한 집중입니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고요.



하루 15분만이라도 거리두기를 통해 삶의 가치에 몰입해보는 게 어떨까요. 요즘 날씨가 뜨겁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합니다. 그 바람을 조용히 느끼는 것, 그것도 몰입입니다. 할 일은 태산 같이 쌓여 있지만 조용히 커피숍에 가 커피 한잔 하며 시집을 읽는 것도 몰입입니다. 몰입을 할 때 자연스럽게 이완이 일어나고 내 삶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해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가 내 감성 기억에 저장되고요.



 가치를 내 몸에 저장하는 건 인생 후반에 몰아서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삶의 가치는 오늘 몰입하고 저장해야 오늘이 나에게 의미 있는 하루로 기업됩니다. 몰입 없이 바쁘게만 살면 허무란 건망증이 찾아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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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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