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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박근혜의 6개월, 박정희의 2년 반

이하경
논설실장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가을 내내 초조했다. 미국이 농산물 원조를 중단했다. 정권을 민간에 넘기겠다는 약속을 깨고, 그해 8월 13일 대선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심각한 흉작으로 곡물 값이 치솟던 시기여서 타격은 더 컸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최빈국(最貧國)의 지도자는 약속했던 민생고 해결은커녕 민심이반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해 전에 단행한 통화개혁의 실패도 발목을 잡았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밀고 나갈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던 박정희는 통화개혁이라는 극약처방을 승부수로 띄웠다. 화폐교환 과정에서 노출되는 검은돈을 은행에 묶어놓은 뒤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비판을 각오한 비상조치였다. 미국이 눈치채지 못하게 새 화폐를 영국에서 찍었다. 서두르느라 ‘조폐공사’를 ‘조페공사’로 잘못 인쇄하기까지 했다. 1962년 6월 9일 밤 10시 통화개혁이 공포되자 허를 찔린 미국은 격분했다.



 미국은 부산·인천항에 들어온 잉여농산물의 하역을 거부하면서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원조가 생명줄이었던 한국으로서는 거부할 힘이 없었다. 박정희는 한 달여 만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예금동결을 해제하는 형식으로 화폐개혁을 전면 백지화했다. 돈 없이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차 연도인 1962년의 성장률은 2.2%에 그쳤다. 경제기적의 신화를 만들어낸 박정희였지만 초기에는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취임 100일을 갓 넘긴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만 좋은 점수를 받았을 뿐 전체적으론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사 분야는 낙제점이다. 게다가 새 대통령에게 가장 힘이 실리는 당선(2012년 12월 19일) 직후의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별 성과 없이 흘려보내고 말았다. 박정희 집권 초반의 시행착오가 데자뷰된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신(神)이 나에게 (하루에) 48시간을 주셨으면…”이라고 했다. 부실 인사의 후유증으로 정부 구성이 늦어진 데 대해서도 “출발이 늦다 보니 100일이라는 게 별로 실감도 안 나고…”라고도 술회했다. 아직 당선인 신분이었을 때 외채협상을 성공시켜 외환위기 극복의 전기를 마련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140개나 되는 국정 과제와 공약 가계부를 꺼내 볼 때마다 남아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독재로 권력을 연장해 18년을 집권한 아버지와 달리 단 하루의 임기도 늘릴 수 없다. 2018년 2월 24일에는 청와대에서 나와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있다. 시간의 밀도(密度)를 높이는 것이다. 과제를 푸는 데 생각이 다른 세력도 참여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비판적 문제의식까지 폭넓게 받아들이면 된다.



 사실 박정희가 그렇게 했다. 박정희 경제모델의 핵심인 경제개발계획은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던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부가 만든 것을 찾아내 손질한 결과물이다. 집권하자마자 부정축재자로 잡아들여 가뒀던 대기업 총수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경제개발의 선봉장으로 활용했다. 파격과 반전, 시대 흐름에 맞춰 생각을 수정해 나가는 유연한 실용주의로 난관을 돌파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고용률 70% 달성과 복지중심 공약 이행비용 135조원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도 의지를 갖고 추진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전통적으로 야당이 주도해왔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의제다. 공통적으로 노동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 노동은 인간을 다루는 문제다. 숫자와 통계 중심으로만 접근하다 보면 인간의 문제라는 본질을 잊을 수 있다.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숫자’만 남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다”라고 한 김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우주적 가치를 지닌 개별적 인간의 삶의 조건과 애환에 귀 기울여야 진심도 통할 것이다.



 생각을 달리하는 세력까지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동업자로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나의 취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능한 적의 도움을 받으면 거꾸로 완전무결해질 수 있다. 삶의 현장도 멀리하면 안 된다. 시간제 근로에 관심이 크다면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밤을 새운 근로자의 고단한 삶과 희망을 마주해야 한다. 정답은 공무원들이 만든 깔끔한 보고서가 아닌 현장의 한숨과 눈물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박근혜의 성공 여부는 인간 박근혜의 변화에 달려 있다.



이하경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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