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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Made in 청계천 '하늘의 등대' 세계를 밝히다



“야! 12개는 만들었는데, 2개는 그 회사 고유의 롬(ROM)칩이 없어서 안 되겠어.” 김병노(56·사진) 한국공항공사 R&D센터장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친구 노모(56)씨의 얘기를 선뜻 믿기 힘들었다. 타버린 계기착륙시설(ILS)과 전방향무선표지시설(DVOR) 내 모듈 14장을 청계천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그에게 넘겨준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때는 2000년이었다. 김포공항에 큰 벼락이 쳐 핵심 장비들의 모듈이 타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레이더 시설을 관리하는 전파탐지부장이었던 김 센터장은 해외 장비 제작사로부터 “모듈 1장당 500만~8000만원이고 그나마 구하려면 몇 개월이 걸린다”는 답변을 받고 망연자실했다. 자칫 공항 운영이 마비될 수도 있는 위기였다.

터키서 항행장비 290만 달러 수주 … 공항공사, 국산화 10년 스토리
최고 8000만원 수입품 14개 벼락에 불타 공항 마비 위기



 그때 김 센터장이 떠올린 사람이 고교 동기인 ‘청계천 공장장’ 노씨였다. 만학으로 경영학석사 학위를 따낸 김 센터장이지만 1976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광운공고를 졸업한 고졸 공무원이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인재가 그처럼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뒤 사회에 진출했다. 광운공고에서만 1년에 주·야간을 합쳐 1080명의 인력이 배출됐다. 김 센터장은 “소니 워크맨 신제품 광고가 일본에서 방영되면 며칠 뒤 청계천에 거의 같은 품질의 모조품이 나왔다”며 “그 정도로 청계천 기술자들의 실력은 뛰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을 보내 노씨에게 고장 난 모듈을 건네주고 어떤 부품들인지 설명도 해줬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 만에 낭보가 전해진 것이다. 김 센터장은 “너무 기뻐서 ‘큰일 했다. 얼마 줄까?’라고 물었더니 친구가 고민 끝에 ‘처음이니까 공짜다. 대신 다음부터는 장당 50만원씩 줘야 돼’라고 하더라”라며 “나름대로 바가지를 씌운 가격이 고작 50만원이었던 것”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뒤돌아서 생각해 보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재야 기술자’가 일주일 만에 ‘바가지 요금’ 포함해 50만원의 비용으로 고칠 수 있는 부품을 그동안 해외에서 열 배 이상 가격을 주고 공급받아 온 것이 온당하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비 국산화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항공기술훈련원 시설팀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 센터장은 각 공항에 “고장 난 모듈이 있으면 폐기하지 말고 훈련원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그러고는 직원 3명을 청계천의 노씨 공장으로 보냈다. 모두 기사 1급 자격이 있는 4년제 대학 출신이지만 다행히 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자 이들은 고장 난 모듈을 70% 이상 고쳐냈다.



한국공항공사가 지난해 피지의 난디공항에 설치한 DVOR과 DME 장비.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이 DME 안테나이고, 작은 버섯 모양의 물체들이 DVOR 안테나다. DVOR안테나 아래에 넓은 장치는 DVOR 전파를 공중으로 방출시키는 반사판이다. [사진 한국공항공사]


 국산화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긴 김 센터장은 윗선에 국산화 방안을 건의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2003년에야 윤웅섭(71) 전 사장이라는 해결사가 나타났다. 훈련원으로 초도 순시를 나온 그는 김 센터장으로부터 국산화 필요성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당장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김 센터장과 ‘청계천 수제자’ 3명이 태스크포스팀을 꾸렸다. 첫 목표는 DVOR. 항공기에 무선신호로 방향을 알려주는 ‘하늘의 등대’이자 가장 비싸고 고장이 잦은 장비이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2004년 첫 국산 DVOR이 탄생했다. 세계 정상권에 올라 있던 국내 정보기술(IT)을 이용해 아날로그 기반이 아닌 디지털 기반으로 제작된 장비였다. 디지털 장비는 아날로그 장비에 비해 열이 덜 나서 고장이 적고, 제작비도 저렴하다. 여기에 그동안 사용한 해외 4~5개사 제품들의 장점들도 두루 취했기 때문에 품질은 세계 일류급이었다.



 하지만 품질과 영업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항행장비 입찰에 참여하려면 5년 이상의 장비 설치 및 운용 실적이 필요했다. 당시 관리본부장이었던 성시철(64) 현 공항공사 사장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간신히 “그럼 테스트라도 한번 해봅시다”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평가에서 외국 제품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보인 뒤에야 이 제품은 김해공항에 설치될 수 있었다.



 해외 진출은 더 어려웠다. 2006년부터 터키 입찰에 참여했지만 ‘5년 실적’ 조항 때문에 세 번 연속 고배를 마셨다. 고심 끝에 찾아낸 해답이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이었다.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적개발원조 사업인 EDCF에는 현금 지원뿐 아니라 인프라 건설 원조도 포함돼 있었다. 김 센터장 등은 EDCF사업 목록을 훑은 결과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라긴딩간 공항 건설사업을 찾아냈다. 이 사업에 포함된 유일한 외국 제품이 바로 노르웨이의 항행장비였다. 장비 국산화 이전에 이미 계약이 체결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장비 교체는 쉽지 않았다. 이때 많은 이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당시 필리핀 대사였던 최중경(57)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취지 설명을 듣자마자 “당연히 내가 해줘야 하는 일”이라며 자기 일처럼 나섰다. 수출입은행·KOTRA·한국국제협력단(KOICA)도 힘을 보태줬다. 마지막에는 정종환(65) 당시 국토부 장관까지 나서서 “우리나라에서 보증하는 장비”라며 보증서를 써줬다. 그제야 필리핀 정부는 한국 장비를 받아줬다.



 입찰을 통한 해외 수출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한국 장비의 우수성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2010년에는 3전4기 끝에 드디어 터키 시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북한이 지척이라 자칫 실수하면 항공기가 영공을 넘어가버릴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쓰는 장비니 얼마나 정밀하겠느냐”는 설득이 먹혔다. 첫 수주 이후에는 탄탄대로였다. 품질력을 인정받아 올해까지 4년 연속 터키 수주전에서 승리했다. 올해의 경우 이 분야 세계 1위인 프랑스 방위산업체 탈레스 등 세계 굴지의 기업들을 물리치고 지난달 10일 290만 달러 규모의 터키 내 6개 공항 항행장비 설치 공사를 따냈다. 국산 장비가 설치된 터키 공항만 15개에 달한다.



 공사는 현재까지 ILS·DVOR·전술항법장비(TACAN)·거리측정장비(DME) 등 총 15종의 장비를 국산화했고 11종의 장비를 개발 중이다. 또 터키·사우디아라비아·페루·수단·이란·태국 등 16개국에 205개 장비를 판매해 358억원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이제 첫발을 뗐다고도 볼 수 있지만 공사의 꿈은 작지 않다. 2020년 연간 매출액 1342억원 달성, 2020년 세계 ‘빅3’ 등극 등 목표들을 보면 너무 거창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김 센터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매출액 목표치는 오히려 보수적으로 잡은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목표치의 3배 달성도 가능하다고 본다” 고 말했다. 노씨의 실명을 물었지만 “해외에 이민 간 상태라 실명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박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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