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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인 쌍기를 재상 등용 … 중국계 관료 40명 달해

원나라의 고려 간섭기 때 역사가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년)이 충선왕과 나눈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고려사의 재발견 광종(光宗)① 개방 정책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은 고려 4대 왕 광종(光宗·927~975년, 949~975년 재위)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고려사』 권110 이제현 열전)
 
이제현은 교육기관을 확충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익히게 해 고려의 문물을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높인 군주로 광종을 꼽았다. 광종은 호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왕권을 강화한 전형적인 전제군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학계 역시 광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광종의 호족 숙청이 당시 정계에 워낙 큰 광풍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문치(文治)와 교화(敎化)를 중시한 광종의 통치를 새롭게 평가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광종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을 두고 ‘현명한 사람을 쓰는 데 차이를 두지 않았다’(立賢無方)고 말할 수 있을까? 쌍기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찌 임금을 착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임금이) 참소를 믿어 형벌을 함부로 쓰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그러나)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文士)를 뽑은 것은 광종이 문사를 등용하여 풍속을 바로잡으려는(用文化俗)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쌍기 또한 그 뜻을 따라 아름다운 일을 이루는 데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려사』 권2 이제현의 광종에 대한 평가)
 
이제현은 주변의 아첨을 믿어 숙청을 단행한 광종의 전제정치와 이를 막지 못한 광종의 측근이자 중국 귀화인인 쌍기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귀화인 쌍기를 등용하고, 그를 통해 과거제도를 실시해 훌륭한 선비를 발굴함으로써 고려의 학술과 문화 수준을 높인 점에서 광종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은 광종의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인재 등용책을 주목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고려에 귀화해 관리가 된 중국계 고려인 채인범의 묘지명.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려시대 묘지명이며,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쌍기 이어 아버지 쌍철까지 고위직 앉혀
이와 함께 “광종의 숙청을 막을 사람은 쌍기밖에 없다”는 이제현의 언급을 통해 쌍기와 같은 외국인 귀화 관료가 새로운 정치집단이 돼 광종 정치의 또 다른 중심축이 된 것도 확인하게 된다. 쌍기로 상징되는 외국인 관료의 채용은 광종 정치, 나아가 고려왕조의 개방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쌍기는 중국 후주(後周)사람이다. 광종7년(956년) 광종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렀다. 그를 만난 광종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중국에 요청해 고려에 머물게 했다. 발탁 1년도 되지 않아 쌍기는 문병(文柄·학술계의 권력)을 장악했다. 958년(광종9)에는 과거제도를 건의하였고, 여러 번 과거의 고시관으로 임명돼 학문을 권장하여 고려에 문풍(文風·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났다. (중략) 959년(광종10) 아버지 쌍철(雙哲)도 아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고려에 와 좌승(佐丞·3품)에 임명되었다.”(『고려사』 권93 쌍기 열전)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그로 인해 학문이 권장되면서 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고려의 문물이 중화의 그것에 버금갔다는 이제현의 지적과 같은 내용이다. 즉 광종 때 고려의 문물 수준을 높이는 데 귀화인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광종은 외국인 쌍기만을 예외적으로 등용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광종의 묘 헌릉(憲陵).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고려시대 독특한 장례문화의 하나는 죽은 자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을 지상에 세우지 않고 관과 함께 지하에 매장하는 것이다. 지상의 묘비명(墓碑銘)과 구분하여 묘지명(墓誌銘)이라 한다. 묘지명은 땅속에 매장됐기 때문에 많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현재 확인된 것은 약 320점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묘지명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것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관리다. 채인범의 묘지명은 그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공(公)의 성은 채이고, 이름은 인범이다. 송나라 강남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뵀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禮賓省郎中·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채인범 묘지명)

광종이 외국인을 등용하여 고려를 선진화하려는 노력이 채인범의 묘지명 속에 상징적으로 기록돼 있다. 채인범과 같이 공식 역사기록은 없지만 고려 전기에 중국(오대 및 송나라)과 거란·발해·여진 등에서 많은 인물이 고려에 귀화하여 정착한다.

그중 관료가 된 사람은 주로 중국계 귀화인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만 40명 정도나 된다. 반 이상이 학자나 문인 계통의 인물이다. 대부분 관리가 됐고 나머지는 상인·음악인·승려·역관(譯官)·의술·무예·점성술 등에 능한 특수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도 능력에 따라 관직을 얻은 경우가 있다. 이 가운데 쌍기와 같이 재상이 되는 등 행적이 뚜렷하여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거란 출신 위초(尉貂·효행)와 발해 출신 유충정(劉忠正·국왕의 총신)을 포함해 중국인 주저(周佇·재상)·유재(劉載·재상)·신수(愼脩·재상)·신안지(愼安之·재상)·쌍철(3품)·호종단(胡宗旦·5품)·임완(林完·6품) 등 모두 10명이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외국인 기술자도 '글로벌 코리아' 혜택
우리 역사에서 외국인 출신이 고위 관료가 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적이 있었던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 재미 한국인조차 입각에 실패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능력을 구비한 인재를 가리지 않고 등용한, 광종의 ‘입현무방’의 인재 등용이 쉽지 않음을 누구나 실감했을 것이다. 천년 전 고려왕조가 능력 있는 외국인을 고위 관료로 등용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개방 정책의 아이콘은 이러한 인재 등용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표현대로 고려는 국제화·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왕조, 즉 ‘글로벌 코리아’의 원조(元祖)가 되는 셈이다.

고려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호족에 좌지우지되는 낡은 관료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 많은 외국인이 관리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 정책은 광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1세기 초 고려는 관료 엘리트뿐만 아니라 기술자들도 정책적으로 받아들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조).

포로는 노비로 만들어 공을 세운 사람에게 분배하는데, 고려는 기술자를 가려 그들의 기술을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11세기 중엽 문종은 송나라 진사 출신인 장정(張廷)이 귀화하자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어 훌륭한 선비를 얻은 기쁨을 말하며 “타산(他山)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고려사』 권5 문종 5년(1052) 6월조)라고 했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는 문종의 생각은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수도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있다. 민(閩·중국 복건성) 지역 사람이 많은데, 상선을 타고 왔다. 고려는 몰래 그들의 재능을 시험·회유하여 관리로 삼거나 강제로 평생 머물게 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이들 중 일부는 진정을 하여 귀국하기도 했다.”(『宋史』 고려 전)

수도 개경에 많은 중국인이 들어왔고, 고려 정부는 재능 있는 자를 가려 관리로 삼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12세기 무렵 고려의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광종은 그 개방 정책의 물꼬를 튼 군주였다. 이는 군사와 경제력에 의존하던 호족의 권력 정치를 청산하고 유교와 선진 문물에 눈뜬 문신 중심의 문치주의 정치를 열게 한 신호탄이었다. 광종의 정치를 재평가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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