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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워런 버핏 … 기부하는 갑부들의 경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힐링(healing)이 필요하다. 사회의 상처가 아물면 개인의 아픔도 줄어든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물을 창출하고 있지만 시장경제에서 억압받거나 소외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겐 기쁜 소식이 필요하다. 강철왕(鋼鐵王) 앤드루 카네기(1835~1919)가 쓴 『부(富)의 복음』은 희소식의 원천이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⑧ 앤드루 카네기의 『부(富)의 복음』

카네기는 생전에 재산의 90%를 사회에 헌납했다. 3억7000만 달러, 요즘 가치로 50억 달러가 넘는 돈이다. 그의 롤 모델은 재산을 털어 대학을 설립한 스탠퍼드·밴더빌트 가문이었다. 훌륭함도 돌고 돌며 전염된다. 카네기가 전 세계 갑부들의 모범이라면 『부의 복음』은 기부자의 경전이 됐다. 빌 게이츠는 『부의 복음』을 숙독하고 1994년 빌게이츠재단을 설립했다. ‘오마하의 현인’인 워런 버핏도 카네기를 본받아 재산의 85%를 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2006년 밝힌 바 있다. 카네기는 ‘현인들의 현인’이다.

시어도어 마소(1859~1922)가 1913년 찍은 카네기의 모습.
가족 상속과 사후 기부엔 반대
1889년 노스아메리칸리뷰(NAR)라는 문예지에 처음 실린 『부의 복음』은 『공산당 선언』을 능가하는 파괴력이 있지만 아주 짤막한 문헌이다. 4829단어, A4 용지 5~6장 분량이다. 『부의 복음』에서 카네기는 부의 격차가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전근대 세계의 왕후장상이 누리던 것보다 더한 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카네기는 잘살고 못사는 것은 행운도 작용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야망 차이라고 봤다.

카네기에 따르면 부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는 사회에 속한다. 사회가 원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철도·교량·마천루·자동차에 들어가는 강철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에 자신이 부자가 됐다는 것을 카네기는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산물”이라고 했다.

재산을 저승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공수래공수거다. 부를 처분하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카네기는 정리한다. 가족에게 물려주거나, 죽을 때 기부하거나, 살아 있을 때 사회로 환원할 수 있다. 재산은 후손에게 짐이 된다며 재산 상속에 반대했다.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없어 부자의 후손들이 변변치 않은 인생을 살게 된 것을 카네기는 수없이 목격했다. 둘째 방법에도 반대했다. 고인의 뜻대로 돈이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카네기가 쓴 『자서전』의 한글판(왼쪽)과 『부의 복음』의 영문판 표지.
결국 사회에서 나온 부를 살아 있을 때 사회로 돌려주는 게 최고라고 카네기는 주장했다. 돈 버는 데 들인 공만큼 살아서 사회에 헌신하라는 것이다. 『부의 복음』을 요약하면 “부자로 죽는 것은 망신”이라는 한마디다. 카네기는 선언만 한 게 아니라 실천했다. 1901년 JP 모건에게 회사를 2억5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모건은 카네기에게 “세계 최고 부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가 됐다. ‘현대 자선사업의 아버지’라는 영예도 얻었다.

공원, 교회, 대학,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병원, 음악당에 돈 대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도서관을 좋아해 5000여 곳을 건립했다.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똑똑해진 것은 도서관 책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깊이도 있고 넓이도 있는 독서를 했다. 써먹기 좋은 경구는 반드시 암기했다.

자선사업가였지만 악덕 기업주
기부의 원칙이 있었다. 가난하다고 무조건 도와주면 의존심만 키운다고 판단했다. 도서관의 경우 건립 후 유지·관리를 자치단체가 약속해야 자금을 기부했다. 그는 500개 대학을 후원했는데, 1901년에는 대학 교수들을 위한 연금기금도 마련했다. 교수들이 가난하면 사회주의를 찬양하게 된다고 판단했다.

은퇴 후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카네기는 베푸는 게 즐거웠다. 물론 그도 버럭 화를 내는 일이 있었지만 그의 비서는 “카네기처럼 항상 행복한 사람은 못 봤다”고 술회했다. 카네기는 그러나 ‘악덕 기업주’였다. 그의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892년 피츠버그 인근 홈스테드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구사대’를 동원해 10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스코틀랜드에 머물며 자신이 원격 조정했지만 “회사가 한 일이라 나는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가난한 베틀직공의 아들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카네기는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갔다. 소년 가장으로서 온갖 고생을 겪었다. 방적공, 기관조수, 전보배달원, 전신기사, 철도회사 직원을 거쳐 빌린 돈으로 투자해 거부가 됐고 마침내 자신의 강철회사를 갖게 됐다. 뛰어난 머리와 냉혹함으로 최대 이윤을 추구했다. 성공하겠다는 젊은이들에게는 친절한 멘토였다. 겉으로는 노동자의 친구를 자처했지만 내심으로는 노동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했다. 자신의 출신 계층에서 멀어진 카네기는 노동자들이 왜 자신처럼 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임금을 올려줘봐야 함부로 낭비할 것이라고 속단했다. 하지만 1901년 홈스테드 노동자들을 위해 연금을 만들었다.

1m52㎝의 단신이었던 카네기는 정치·국제정치 분야에서도 ‘작은 거인’이었다. 세계정부, 해군 군축,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맹을 주창한 것도 그다. 『승리하는 민주주의』(1886), 『오늘의 문제: 부, 노동, 사회주의』(1907), 『자서전』(1920) 등 10여 권의 글을 남겼다. 공화당원이었던 카네기는 노예제에 반대했다. 미국 제국주의에도 반대했다. 50세까지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는 꿈을 품었기 때문이다.

7년 내연관계였던 루이즈와 결혼한 것은 52세 때다. 20대에는 돈 버느라 바빠 연애를 못했다. 30대 후반부터는 거의 은퇴 상태라 하루 몇 시간만 일했지만 마마보이인 카네기는 어머니 마거릿이 살아 있을 때에는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부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스키보(Skibo) 성에서 귀족·왕족·명사들과 어울렸다.

카네기는 역사의 우연과 필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부의 복음』을 쓴 그가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것, 이민 온 피츠버그는 공교롭게 미국 산업혁명의 요람이었다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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